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이란 /페르세폴리스

eorks 2018. 12. 28. 00:11

세계문화유산 /이란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 1979)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이란[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이며, 고대 페르시아 어로는 파르사(Parsa), 현대 페르시아 어로 'The Throne of Jamshid(잠시드의 옥좌)'라는 뜻이다. 이란 남서부 파르스 주(Fars Province)의 주도인 시라즈(Shiraz)에서 북동쪽으로 51㎞ 정도 떨어져 있으며, 풀바르 강(루드하네예시반드)과 루드에코르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의 거주 흔적을 발견했지만 비문에는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 550~486 BC, 재위 522~486 BC) 시절에 이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왕가의 방계 혈족에 속하는 다리우스 대왕은 키루스 대왕(Cyrus Ⅱ; 재위 559~529 BC)이 묻혀 있는 파사르가다이(Pasargadai)를 떠나 페르세폴리스를 페르시아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산이 많은 외딴 지역에 세워진 페르세폴리스는 왕이 거처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왕은 주로 봄에만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an dynasty)의 실제 행정은 수사(Susa)나 바빌론(Babylon) 또는 엑바타나(Ecbatana)에서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이 아시아를 침략한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 인들에게 알려졌다. BC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은 이 도시를 약탈하고 크세르크세스(Xerxes) 왕의 궁전을 불태웠는데 이것은 아마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의 보복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BC 316년에도 페르세폴리스는 여전히 마케도니아 제국의 속주인 페르시스의 수도였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Empire) 시대부터 이 도시는 차츰 쇠퇴해 허물어진 폐허만이 옛날의 영화를 증언하게 되었다. 3세기에 사산 왕조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자 부근에 있는 이스타크르(Istakhr)가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페르세폴리스는 거대한 단구(段丘) 위에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단구의 동쪽은 쿠에라마트['자비의 산']와 맞닿아 있고 나머지 세 방향에는 산사태를 막기 위한 옹벽이 쌓여 있는데 이 옹벽의 높이는 땅의 경사도에 따라 4~12m로 다양하다. 서쪽에는 웅장한 이중 계단이 있어서 111단의 완만한 돌계단을 2번 올라가면 꼭대기가 나온다. 단구 위에는 근처 산에서 가져온 암회색의 화산암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들의 유적이 수없이 남아 있다. 이 화산암들은 대리석에 못지않을 만큼 매끄럽고 단단하게 다듬은 다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잘라 접착제도 바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올렸는데 그 대부분이 지금도 제자리에 남아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다리우스 대왕의 알현실[아파다나]에 아직도 서 있는 13개의 거대한 원기둥이다. 다리우스가 수사에 지은 알현실도 아파다나라고 불린다. 크세르크세스 관문 입구에는 2개의 원기둥이 서 있고, 3번째 원기둥은 깨진 조각들을 모아서 그곳에 다시 복원해놓았다. 1933년에 다리우스 대왕의 알현실 토대 속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국경선이 3가지 형태의 설형문자[고대 페르시아 문자, 엘람 문자, 바빌로니아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2벌의 금판과 은판이 발견되었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519경~465 BC, 재위 486~465 BC) 및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 ?~338 BC, 재위 359/358~338 BC)가 돌에 새긴 수많은 비문들은 어느 왕이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를 알려준다. 가장 오래된 비문은 남쪽 옹벽에 새겨져 있는 다리우스의 유명한 기도문인 "신이여, 이 나라를 적과 굶주림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하소서."이다. 페르시아와 메디아 및 엘람 왕국 관리들의 얼굴을 새긴 부조도 많이 남아 있고, 춘분에 열리는 국가적 축제 때 자기 고장의 특산물을 왕에게 공물로 바치려고 페르시아 인이나 메디아 인의 안내를 받아 제국의 변방에서 찾아온 사절단의 모습을 묘사한 부조도 유명하다. 이 부조는 모두 23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면들 사이에 삼나무를 새겨 장면을 구분하고 있다.

타흐트에잠시드 뒤에는 산허리를 잘라서 만든 3개의 무덤이 있는데 무덤들의 정면[그 중 하나는 완성되지 않았다.]은 부조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13㎞ 정도 떨어져 있는 풀바르 강 건너편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는데 중턱을 깎아서 만든 4개의 비슷비슷한 무덤은 골짜기 바닥에서 상당히 높이 올라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 아래쪽에 사산 왕조(Sasanian dynasty)의 신화적 영웅 로스탐을 상징하는 도안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 유적을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 '로스탐의 그림')이라고 부른다. 이 7개 무덤의 주인들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이라는 사실은 거기에 새겨진 조각으로 추정할 수 있고, 나크시에 로스탐에 있는 무덤 하나는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인 다리우스 1세의 무덤이라고 비문에 뚜렷이 적혀 있다. 그리스 역사가인 크테시아스의 말에 따르면 다리우스 1세의 무덤은 벼랑 중턱에 있어서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만 닿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다리우스의 무덤 입구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그의 품성을 설명하고, 신은 그에게 지혜와 활력이라는 2가지 특별한 자질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크시에로스탐에 다리우스의 무덤과 나란히 있는 나머지 3개의 무덤은 크세르크세스 1세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및 다리우스 2세의 무덤일 것이다. 다리우스 2세(Darius II; ?~404 BC, 재위 423~404 BC)의 선왕인 크세르크세스 2세는 짧은 기간에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런 호화로운 기념물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형의 왕좌를 빼앗아 몇 달 동안 나라를 다스린 소그디아누스(세키디아누스)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타흐트에잠시드 뒤편에 완성된 2개의 무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3세의 무덤일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무덤은 길어야 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아르세스의 무덤일지도 모르지만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서 알렉산더 대왕에게 폐위당한 다리우스 3세(Darius III; 380~330 BC)의 무덤일 가능성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