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이야기 21

21. 一峰二峰三四峰(일봉이봉삼사봉)(하나 둘 셋 넷 봉우리)

21. 一峰二峰三四峰(일봉이봉삼사봉)(하나 둘 셋 넷 봉우리)        明宗 때의 명필이요 풍류객이었던 蓬萊 楊士彦(봉래 양사언)이 수십 질 높        이의 암벽에 새겼다는 세 글자를 바라보며 일만 이천 봉우리 중        에서 47개의 봉우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偈惺樓(게성루)가 여기에서 멀        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금강산의 참된 면목을 알려거든 석양 무렵에 게성루에 올라 보라."         (欲識金剛眞面目 夕陽須上偈惺樓(욕식금강진면목 석양수상게성루))는 옛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藥師庵(약사암), 白雲庵(백운암), 兜率庵(도솔암), 迦葉庵(가엽암) 등 수없이        많은 암자를 지나 드디어 게성루 에 올랐..

김삿갓 이야기 2024.09.20

20. 其於林下鳥聲何=기어임하조성하(숲 속의 새소리야 무슨 수로 그릴꼬)

20. 其於林下鳥聲何(기어임하조성하)(숲 속의 새소리야 무슨 수로 그릴꼬)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겼다고는 하지만 북으로 북으로 걸음을 거듭한 김삿갓         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금강산에 도착하였다.         산수를 좋아했던 옛 선비들이 그토록 황홀해하면서 찬탄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금강산이다.         산길을 걸어가노라니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산과 산, 물과 물, 소나무와 바         위뿐이건만 어디를 보아도 절경이 아닌 곳이 없어서 그의 머릿속에서는 저        절로 시 한 수가 그려지고 있었다.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고 도니              물과 물, 산과 산이 한데 어우러져 가는 곳마..

김삿갓 이야기 2024.09.19

19. 妻妾同房(처첩동방)

19. 妻妾同房(처첩동방)        이번에는 김삿갓이 운이 좋아서 과객접대를 잘하는 부잣집 사랑에서 하루         를 묵었다.         그런데 주인은 보이지 않고 객들만 둘러앉아서 질펀한 잡담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인즉 주인영감은 복이 많아서 그 나이에 젊은 처첩을 거느리는데         치마폭을 떠나지 못해 항상 사랑보다는 안방을 좋아할 뿐 아니라         괴팍한 성미라서 그런지 고대광실 그 많은 방들을 다 놔두고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를 한 방에 데리고 산단다.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김삿갓은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         릴 번했다.         불현듯 두 마누라를 좌우에 누여 놓고 자는 광..

김삿갓 이야기 2024.09.18

18. 惰 婦(타부)=게으른 여자

18. 惰 婦(타부)=게으른 여자        김삿갓이 어느 날 두메산골 오두막집에서 또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선량하기 그지없었으나 젊은 아낙은 잠깐 보아도 게         으르고 방자하여 주부다운 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낮잠을 자고 있는 여인은 빨래를 언제 해 입었는지         옷에서는 땟국이 흐르고 윗목에 놓인 베틀에는 먼지가 뽀얗다.         남편의 성화에 마지못해 부엌에 들어간 아낙은 그릇 깨는 소리만 요란하게         내더니         통옥수수 밥에 짠지 몇 쪽을 들이밀고는 건너 마을 굿 구경을 가서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조반은 주인이 직..

김삿갓 이야기 2024.09.17

17.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빙그레 웃고 대답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17.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빙그레 웃고 대답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         죽장망혜로 대자연속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김삿갓의 가슴은 상쾌하기 이를데        없었다.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시야를 가로막는 첩첩 태산들은 아직도 아침안개 속        에 잠겨 있는데         저 멀리 산골자기에 흘러가는 물소리가 그를 반갑게 맞아 주는 듯 했다.         귀를 기우리니 멀고 가까운 산에서 처연하게 울어대는 새소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하나의 교향악처럼 아름답게 들려온다.         이렇게 좋은 산수를 내버려 두고 내가 왜 어리석게도 속세에 얽매여 있었 더란        ..

김삿갓 이야기 2024.09.15

16. 飛來片片三春蝶(비래편편삼춘접)(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 같고)

16. 飛來片片三春蝶(비래편편삼춘접)(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 같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사이에 어느덧 세월은 흘러 겨울에 접어들었다.         다행이 이번에도 사람을 알아보는 좋은 주인을 만나 며칠 동안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시문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밥에 눈이 얼마나 내렸         는지 산천초목이 모두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천황씨가 죽었는가. 인황씨가 죽었는가.               산과 나무가 모두 상복을 입었구나.               해님이 부고 듣고 내일이라도 문상을 오면               집집마다 처마 끝이 눈물을 흘리리라.            天皇崩乎人皇崩(천황붕호인황..

김삿갓 이야기 2024.09.13

15. 探花狂蝶半夜行(탐화광접반야행)(꽃을 탐하는 미친 나비 한밤에 찾아드니)

15. 探花狂蝶半夜行(탐화광접반야행)(꽃을 탐하는 미친 나비 한밤에 찾아드니)        누각에서 홀로 달을 보고 있는 처녀는 다름 아닌 서당 집 후원초당에 숨어서         글만 읽고 있다는 紅蓮이라던 바로 그 규수였다.         김삿갓은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고 말을 걸어 보았지만 대답 없이 달만 바라         보고 있는데 달빛 어린 그 눈이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였다.               다락 위에서 만나 보니 눈이 아름다운데               정이 있어도 말이 없으니 정이 없는 것만 같도다.            樓上相逢視目明(루상상봉친목명)            有情無語似無情(유정무어사무정)         김삿갓은 느낌을 그대로 즉흥시로 읊으면서 규수가 초당에서 글을 읽는다..

김삿갓 이야기 2024.09.11

14. 世上誰云訓長好(세상수운훈장호)(세상에 누가 훈장을 좋다고 하던가)

14. 世上誰云訓長好(세상수운훈장호)(세상에 누가 훈장을 좋다고 하던가)        가끔 수모를 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편히 쉬어 갈만 한 곳은 역시 서당이         었다.         그래서 오늘도 김삿갓은 서당을 찾았다. 초빙해 온 훈장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이 집 주인은 김삿갓을 만나자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며칠을 환대         하며 보내 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람대접을 받으며 쉬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한사코 훈장을 맡아         달라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자유분방한 시인에게 훈장이란 가당치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훈장의 고리타분한 신세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세상에 누가 훈장을 좋다고 하던가...

김삿갓 이야기 2024.09.09

13. 曲木爲椽簷着塵(곡목위연첨착진)(서까래는 굽고 처마는 땅에 닿고)

13. 曲木爲椽簷着塵(서까래는 굽고 처마는 땅에 닿고)        김삿갓이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단칸방 오두막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아들을 셋이나 두었지만 모두 중이 되어 나가고 두 늙은이만 살고 있다는         이 집은         세 사람이 들어앉기도 비좁은 방이지만 주인 내외는 기꺼이 쉬어 갈 것을         허락한다.         고마운 마음에 허리를 굽히고 방으로 들어 왔지만 처마 끝에 부딪쳐 이마에         혹이 달렸고         지금은 다리를 꼬부리고 누웠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평소 남에게 허리를 구부리기 실어하는 그였지만 오늘 밤은 방이 하도 좁         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

김삿갓 이야기 2024.09.08

12. 歸何處 歸何處(귀하처 귀하처)

12. 歸何處 歸何處(귀하처 귀하처)        김삿갓이 산길을 걸어가는데 한 밤중에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찾아가 보니 젊은 여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시신을 놓고 통곡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산골에서 갑자기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기만 하던         여인은 사람을 만나자 염치불구하고 매달려 통사정을 하였고         김삿갓은 어쩔 수 없이 팔자에 없는 남의 초상을 치러 줄 수밖에 없었다.         거적에 말아 지게로 저다 묻어 주는 초라한 장사였지만         밤새도록 넋두리하던 청상과부의 애간장을 녹이는 사연들은 그대로 글로         써서 亡人에게 전해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

김삿갓 이야기 2024.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