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이야기 120

112. 낙화암은 말이 없고

112. 낙화암은 말이 없고    어머니 무덤을 하직하고 내려와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김삿갓은 이    곳이 옛 백제 땅이니 백제고도나 한번 돌아보려고 부여의 부소산에 올랐    다.     낙화암에서 백마강 푸른 물을 굽어보며 잠시 옛날의 비극을 머릿속에 그    려 보며 옛 시 한수를 생각했다.               백마대 텅 빈지 몇 해이런가.               낙화암 꽃이 진지 몇 해이런가.               만약에 청산이 말 할 수 있다면               백제의 천고 흥망을 물어 알련만.               白馬臺空經幾歲(백마대공경기세)               落花岩立過多時(낙화암립과다시)               靑山若不會緘默(청산약불회함묵)      ..

김삿갓 이야기 2025.01.01

111. 헤어질까 두려워

111. 헤어질까 두려워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시는 秋月에게 김삿갓은 얼이 빠져 버렸다.     그러기에 밤마다 춘정을 무르녹도록 나누다가 어느 날 밤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추월을 예찬했다.               옛날부터 가을은 쓸쓸하다 하지만               나는 가을을 봄보다 좋아하노라               맑은 하늘에 학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나의 시정은 하늘에 솟는 것만 같구나.               自古逢秋悲寂寥(자고봉추비적요)               我言秋日勝春朝(아언추일승춘조)               晴空一鶴徘雲上(청공일학배운상)               便引詩情到碧宵(편인시정도벽소)    추월이라는 이름의 秋(추)자를 따 가지..

김삿갓 이야기 2024.12.31

110.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110.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소복차림으로 꿈에 나타난 어머니를 뵙고 부랴부랴 江界(강계)를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도 洪城(홍성)으로 달려온 김삿갓은 이미 10여일 전에    어머니가 돌아 가시어 장례까지 마쳤다는 소식을 마을 어귀의 한 주막    에서 들었다.     그의 노모는 김삿갓이 방랑길에 오르자 친정에 가 늙은 몸을 의탁하다    가 꿈에 그리던 아들을 영영 만나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김삿갓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지만 외가에는 들어갈 면목조    차 없었다.     물어물어 묘지를 찾아간 김삿갓은 무덤 앞에 꿇어앉아 술 한 잔 부어놓    고 어머니를 불러보지만 이미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에게서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울다 울다 날이 저..

김삿갓 이야기 2024.12.30

109. 秋月과 작별하고

109. 秋月과 작별하고    어느덧 깊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와 여기저기 꽃이 만발하고 江界    (강계)고을 전체가 桃源境(도원경)으로 바뀐 느낌이었다.     김삿갓은 어머니 생각이 불현듯 솟아오른다. ‘돌아가시기 전에 가 뵙고    용서를 빌어야지’ 생각이 이에 미친 그는 어렵게 입을 열어 추월에게 알    린다.     추월은 예견은 하고 있었지만 가슴이 메어져 오는 것만 같아 대답을 못    하고 가슴속으로 흐느껴 울기만 했다. 묵묵히 김삿갓을 따라 강가에 나    와서 나룻배를 기다리던 추월은 자기도 모르게 시 한수를 구슬프게 읊    었다.               독로강 긴 둑에 풀내음 향긋한데               정 있고 말 없어 무정한 것 같도다.               정..

김삿갓 이야기 2024.12.29

108. 정인이라 불러주게

108. 정인이라 불러주게    秋月(추월)은 선생님의 시에는 영겁과 찰나, 죽음과 삶, 흥망과 성쇠가 모두    달려 있어서 마치 우주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 한 느낌이 든다면서 이    왕 붓을 드셨으니 끝까지 써 달라고 한다.     김삿갓은 天地萬物之逆旅(천지만물지역려)라는 시의 연속이라면서 다시 써    내려 간다.               하늘과 땅 사이에 큰 집을 한 채 지었으니               지황씨와 천황씨가 주인 남녀로다               헌원씨는 터를 닦아 뜰과 거리를 넓혔고               여와씨는 돌을 갈아 주춧돌을 높였도다.               其中遂開一大廈(기중수개일대하)               地皇天皇主男女(지황천황주남녀)         ..

김삿갓 이야기 2024.12.28

107. 봄 동산에 잠시 핀 꽃은

107. 봄 동산에 잠시 핀 꽃은    김삿갓의 ‘천지는 만물의 역여’라는 長詩(장시)는 그의 춤추는 붓끝에서 그    칠 줄모르고 거침없이 이어진다.               봄 동산에 잠시 피는 복사꽃 오얏꽃은               하늘땅이 내뿜는 숨결과 같은 것               광음이 화살처럼 오가는 이 마당에               죽고 사는 일이 어지럽기만 하구나.               東園桃李片是春(동원도리편시춘)               一泡乾坤長感敍(일포건곤장감서)               光陰瞬去瞬來局(광음순거순래국)                渾沌方生方死序(혼돈방생방사서)               인간은 한 번 살고 가도 만상은 복잡하여               변화의..

김삿갓 이야기 2024.12.27

106. 天地者萬物之逆旅(천지자만물지역려)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주집이다

106. 天地者萬物之逆旅(천지자만물지역려)(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주집이다)    秋月(추월)의 간절한 청을 받은 김삿갓은 반백의 나이에 북녘 변방에서 맞는    除夜(제야)의 감회와 함께 취흥과 시흥이 한데 어우러져 天地者萬物之逆旅    (천지자만물지역려=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주집이다)라는 웅장한 제목을 먼    저 써서 長詩(장시)를 한 편 지어보려는 태세를 취하고,     추월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제1연을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써내려    갔다.              천지는 조물주가 만든 객줏집과 같은 것              말을 달리며 틈새로 엿보는 것 같도다.              낮과 밤이 두 개의 세계로 서로 엇갈려              눈 깜박할 사이에 오고 가고하누나. ..

김삿갓 이야기 2024.12.26

105, 강계에서 맞은 섣달그믐

105, 강계에서 맞은 섣달그믐    한 겨울 江界(강계)의 추위는 살을 에는 듯 맹렬했다. 눈은 오는 대로 쌓이고    모진 바람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이 추위에 秋月(추월)의 보살핌이 아니었던들 김삿갓은 어찌 되었을까. 어쩐    복인지 따뜻한 방에서 술을 마시며 추월의 거문고소리를 듣기도 하고, 시를    읊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꿈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섣달그믐의 밤이다.     추월은 조촐한 술상을 보아 가지고 들어와서 '오늘은 잠을 자서는 안 되는 날    이라고 하니 모든 시름 다 떨쳐 버리고 술이나 마음껏 드시라' 고 했다.     그래서 술이 거나해진 김삿갓은 빈 잔을 추월에게 건네고, 자기고향 선배 이    기도 한 桂田 申應朝(계전 신응조)의 라는 시..

김삿갓 이야기 2024.12.25

104. 고 향 생 각

104. 고 향 생 각    소쩍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불현듯 고향생각이 간절해 왔다.     조선의 북쪽 끝에 와 있으니 김삿갓의 고향은 아득한 남쪽 나라다. 고향을     떠난 지 이러구러 얼마이던가.     이것도 나이 탓일까. 고향생각이 전에 없이 새삼 간절하여 또 다시 시한 수    를 읊는다.               서쪽 땅 13 주를 헤매었건만               아직도 떠날까 머물까 망설이네.               눈비 내리는 한밤에 고향 그리워 잠 못 이루니               산천 따라 나그네 길 몇 해이런가.               西行已過十三州(서행이과십삼주)               此地猶然惜去留(차지유연석거류)               雨雪家鄕人五夜(..

김삿갓 이야기 2024.12.24

103. 강계미인 추월이

103. 강계미인 추월이    조선의 북단, 압록강 상류의 禿魯江(독노강)에 접한 江界(강계)고을은 무척 추    운 지방이 면서도 미인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어느 날 한 정자에 올랐더니 옷매무새로 보아 기생이 틀림없는데도 시를 제법    아는 듯 정자에 걸려 있는 시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속으로 음미하는 여인이 있    었다.     잠시 후 여인은 내려가고 동자에게 물으니 과연 그는 詩書(시서)와 歌舞(가무)    에 모두 능한 강계에서도 일등 가는 기생 秋月(추월)이라 했다.     김삿갓은 장난기가 동하여 동자에게 '내 편지를 써 줄 것이니 가져다주고 답장    을 받아 오라' 고 했다.     동자는 빙긋이 웃으면서 편지를 받아 들고 내려가더니 얼마 후에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

김삿갓 이야기 202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