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이야기 21

11. 許多韻字何呼覓(허다운자하호멱)

11. 許多韻字何呼覓(허다운자하호멱)        김삿갓은 날이 저물어 다시 산골의 한 서당을 찾아가서 하룻밤 유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제법 덩그런 집에서 열여덟 살의 어린 애첩까지 더리고         산다는 70고령의 老訓長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자네 글을 좀 읽었는가?         예, 많이는 못 읽었지만 조금은 배웠습니다.         그러면 내가 韻자를 부를 것이니 詩를 한수 지어 보게, 잘 지으면 재워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고 가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게.         예,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삿갓은 겨우 글방사랑 윗목에 자리를 얻어 앉았고, 훈장은         거만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韻자..

김삿갓 이야기 2024.09.04

10. 我本天上鳥(아본천상조)

10. 我本天上鳥        凋落의 계절인 가을의 哀傷에 젖어 홀로 산길을 걸어가고 있던 김삿갓이         문득 개울건너를 바라보니 낙엽 쌓인 너럭바위 위에 4,5명의 선비들이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詩會를 열고 있었다.         술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김삿갓이 아니었다. 염치불구하고 그들에게         닦아가 술 한 잔을 청했고, 선비들은 불청객을 쫓으려고 시회하는 자리에서         는 시를 짓지 않고서는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했다.         김삿갓은 시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술을 서너 잔 마시면 詩想이 떠오르는 버         릇이 있으니 먼저 술을 달라했고, 선비들은 먼저 시를 지어야 술을 주겠다고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김삿갓 이야기 2024.09.02

9. 梧桐一葉落(오동잎 하나 떨어져)

9. 梧桐一葉落(오동잎 하나 떨어져)      오두막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나온 김삿갓은 다시 산길을 걸어간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면서부터 시작된다던가.        어떤 시인은 가을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동 나뭇잎 하나 떨어져                   온 누리가 가을임을 안다.                   梧桐一葉落(오동이엽낙)                  天下盡知秋(천하진여추)      봄이 蘇生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凋落의 계절이요,        조락에는 哀傷이 따르게 마련임으로 고금을 막론하고 가을을 노래한 시는        한결같이 애달픈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가을바람 불어 ..

김삿갓 이야기 2024.09.02

8. 盤中無肉權歸菜(반중무육권귀채)

8. 盤中無肉權歸菜(반중무유권귀채)            尹富者 집에서 쫓겨난 김삿갓은 다시 고개를 넘어 얼마를 더 걸었지만          이제는 날이 어둡고 다리도 아파서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길가의 오두막집을 찾아가 주인을 불렀다.         잠시 후 백발노인이 문을 열고 사정을 듣더니 매우 난처한 듯 잠시 머뭇        거리다가,          방이 하나 밖에 없지만 어두운 밤에 어디를 가겠느냐고,          함께 고생하자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쾌히 승낙을 한다.         노인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부엌을 향하여 '손님이 오셨으니 밥을 한 그릇        더 지으라.' 고 이른다.          그러자 부엌에서는 며느리인 듯싶은 젊은 부인이 알..

김삿갓 이야기 2024.09.01

7. 人到人家不待人(인도인가부대인)

7. 人到人家不待人(인도인가부대인)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한 마루턱에 올라서니 산골치고는 제법 어지간한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尹富者집이 아마도 저 집인가 보다.        안채는 기와를 올렸고 사랑채는 초가인 반 기와집이 마을 한가운데 덩그렇      게 자리하고 있어서        그만하면 나그네의 하룻밤을 의탁할 만해 보였다.       기꺼이 내려가 하루 밤 자고 갈 것을 청하니 60쯤 되어 보이는 주인은 나와      보지도 않고        사랑문을 열고 내려다보면서 손을 휘휘 저으면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사람이 사람 집에 왔건만 사람대접을 안 하니          ..

김삿갓 이야기 2024.08.28

6. 生年不滿百(백년도 못 사는 주제에 )

6. 生年不滿百(백년도 못 사는 주제에)    가슴 속에 쌓였던 世塵(세천)을 깨끗이 떨쳐 버리고 고요한 산 속을 걸으니    마음이 그렇게도 상쾌할 수가 없었다.      無我(무아)의 세계는 바로 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왜 이제까지 헛된 굴레와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번뇌만 거듭하여 왔    는가.              백년도 다 못 사는 주제에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生年不滿百(생년부만백)         常懷千歲憂(상양천세우)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던 그 산아요 그 물이건만 비어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    니 새삼스럽게 아름다워 보였다.      아아, 산과 물이 이렇게도 좋은 것을 이제까지는 왜 모르고 살아 왔..

김삿갓 이야기 2024.08.27

5. 삿갓을 눌러 쓰고

5. 삿갓을 눌러 쓰고    醉翁과 醉談?을 나누다 돌아온 炳淵은 여러 날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면서     번민하지만 별 다른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취옹이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거든 상제처럼 삿갓을 눌러 쓰고 '棄世     人'이 되어 산천경개를 즐기면서 되는 대로 한 세상 보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일 것이라." 고 하던 말만이 세차게 머리를 때린다.     老母에게만 잠시 바람이나 쏘이고 오겠다고 하직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선      병연은 큼직한 삿갓부터 하나 샀다.     비도 안 오는 날에 삿갓을 쓰고 보니 지팡이라도 하나 짚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주막에 들러 취옹과 석별의 정을 나눈다.     병연을 맞은 취옹은 술상을 마주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

김삿갓 이야기 2024.08.24

4. 煩悶(번민)하는 詩人(시인)

4. 煩悶(번민)하는 詩人(시인)    백일장에서 자기가 그토록 추상 같이 매도했던 대역죄인 金益淳이 바로 자     기 할아버지였음을 확인한 金炳淵은 한 순간에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 운명     의 비통함과 조상에게 지은 돌이킬 수 없는 罪責感,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自愧感으로 하여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자처했다.     몇 번이고 죽기로 결심했지만 늙은 어머니의 만류를 거역하지 못한 그는 어     디 가서 술이라도 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전의 백일장 길에 만났던      주막의 凡常치 않은 주인 영감을 머리에 떠 올렸다. 짧은 만남 속에 몇 마디      나눈 대화였지만 그는 분명 예사 노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전일보다 한결 반갑게 맞아 주는..

김삿갓 이야기 2024.08.20

3.통곡하는 어머니

3.통곡하는 어머니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한 金炳淵은 주변의 칭송과 축하를 듣는둥 마는둥         집으로 향했다.  장원급제라는 그 일 자체보다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아들이 장원급제한 것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우리들 삼형제(형 炳夏 아우 炳湖)를 홀로 길러 내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시던가. 3년이 멀다 하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시며 밥을         굶어가면서도 자식들만은 잘 가르치려고 매질해가며 글공부를 독려하시던         어머니셨다.         걸음을 재촉하여 집에 돌아오니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와 아내 황씨가 초조         하게 기다리고..

김삿갓 이야기 2024.08.19

2. 壯元及第(장원급제)한 아들

2. 壯元及第(장원급제)한 아들    金炳淵이 白日場에 나가 응시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 나던 해 늦은 봄의     어느 날이었다.     백일장이란 草野의 無名儒生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각 고을 단위    로  글 짖기 대회를 여는 일종의 地方科擧와 같은 것이었다.    순수하게 학문을 좋아 하였을 뿐,     공명심이나 출세욕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병연은 처음부터 백일장 따위    에는 나가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출세를 할양이면 어엿이 서울에 올라가 과거를 볼일이지, 지지리 못 나게     시골 백일장은 보아 무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시골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해도 그것은     그저 한 고장에서의 명성일 뿐 벼슬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

김삿갓 이야기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