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月(추월)의 간절한 청을 받은 김삿갓은 반백의 나이에 북녘 변방에서 맞는 除夜(제야)의 감회와 함께 취흥과 시흥이 한데 어우러져 天地者萬物之逆旅 (천지자만물지역려=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주집이다)라는 웅장한 제목을 먼 저 써서 長詩(장시)를 한 편 지어보려는 태세를 취하고,
추월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제1연을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써내려 갔다.
천지는 조물주가 만든 객줏집과 같은 것 말을 달리며 틈새로 엿보는 것 같도다. 낮과 밤이 두 개의 세계로 서로 엇갈려 눈 깜박할 사이에 오고 가고하누나. 造化主人遽廬場(조화주인거려장) 隙駒過看皆如許(극구과간개여허) 兩開闢後仍朝暮(양개벽후잉조모) 一瞬息間渾來去(일순식간혼래거)
김삿갓의 시는 첫 구절부터 그 내용이 웅혼한 철학을 담고 있어서 추월을 더 욱 긴장케 했다.
별로 깊이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붓끝에서는 그토록 거창하고 도 도한 문장이 마치 강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돌아보면 우주는 억천만년 내려오는 것 뜻있는 선비들이 간밤에 자고 간 곳일세. 만물은 끝이 있어도 천지는 끝이 없는 것 백년 쯤 살고 가는 나의 여관인 것을--- 回看宇宙億千劫(회간우주억천겁) 有道先生昨宿所(유도선생작숙소) 無涯天地物有涯(무애천지물유애) 百年其間吾逆旅(백년기간오역려)
몽선은 부질없는 말 많이 늘어놓았고 석가도 번잡한 거리에서 많이 떠들었건만 구구하게 살아온 그들의 백년 세월도 연꽃잎에 고인 한 잔 술처럼 허망하도다. 夢仙礧空短長篇(몽선뢰공단장편) 釋氏康莊洪覆語(석씨강장홍복어) 區區三萬六千日(구구삼만육천일) 盃酒靑蓮如夢處(배주청연여몽처)
夢仙(몽선)은 元(원)나라 때에 修心訣(수심결)이라는 저서를 남긴 夢仙和尙 (몽선화상)이요, 釋氏(석씨)는 釋伽牟니(석가모니)를가리키는 말이다. 김삿 갓의 長詩(장시)는 다음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