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月(추월)은 선생님의 시에는 영겁과 찰나, 죽음과 삶, 흥망과 성쇠가 모두 달려 있어서 마치 우주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 한 느낌이 든다면서 이 왕 붓을 드셨으니 끝까지 써 달라고 한다.
김삿갓은 天地萬物之逆旅(천지만물지역려)라는 시의 연속이라면서 다시 써 내려 간다.
하늘과 땅 사이에 큰 집을 한 채 지었으니 지황씨와 천황씨가 주인 남녀로다 헌원씨는 터를 닦아 뜰과 거리를 넓혔고 여와씨는 돌을 갈아 주춧돌을 높였도다. 其中遂開一大廈(기중수개일대하) 地皇天皇主男女(지황천황주남녀) 分區軒帝廣庭街(분구헌제광정가) 鍊石皇媧高柱礎(련석황왜고주초)
길 가던 노인들이 한푼 두푼 보태 준 빚은 명월과 청풍으로 모두 갚았건만 노파가 날마다 극락을 쓸고 닦는 동안 뽕나무 밭이 세 번이나 바다로 변했네. 行人一錢化翁債(행인일전화옹채) 明月淸風相受與(명월청풍상수여) 天台老嫗掃席待(천태노구소석대) 大抵三看桑海都(대저삼간상해도)
우산에 해 저물어 길손은 제나라에 자고 신기루 가을바람에 초나라를 지나간다. 저 멀리 선경에서 새벽 닭소리 들려오니 다함없는 나그네 길엔 너와 내가 없도다. 牛山落日客宿齊(우산낙일객숙제) 蜃樓秋風人過楚(신루추풍인과초) 扶桑玉鷄第一聲(부상옥계제일성) 漂漂其行無我汝(표표기행무아여)
牛山(우산)은 牛眠山(우면산) 즉 명당을 뜻하고, 扶桑(부상)은 전설 속의 선 경을 말한다.
김삿갓은 여기까지 쓰고 붓을 던지며 추월을 향하여 “이 시는 나의 우주관 을 솔직히 고백한 시일세.
이 시에 대한 자네 소감은 어떤가?”하고 물었다.
추월은 벅찬 감격에 사로잡힌 듯 “우주의 복잡다단한 현상을 이처럼 간결 하고 섬세하게 그려 주신 글이 거듭 놀랍기만 하옵니다.
저는 이제야 말로 참 스승을 만나 뵈온 듯 기쁘옵니다.”하고 대답한다.
김삿갓은 다시 술을 몇 잔 기울이고 나서 “이 사람아 자네는 언제까지 나를 스승이라고만 불으려나. 이왕이면 ‘情人(정인)’이라고 한번 불러주게.”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