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이야기 120

81. 「창호」

81. 「창호」    범어스님의 지극한 간호로 김삿갓의 발목은 많이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범어스님은 문종이와 풀을 가지고 와서 뚫어진 창구멍을     말끔히 발라놓고는 창을 활짝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어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데 때마침 산머리에는 달이    솟아오르고 골짜기에서는 물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범어는 즉흥시를 한 수 지어 김삿갓에게 내밀며 시평을 청    했다.               바람이 부니 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달이 솟아오르니 물결이 높아지네.               風動樹枝動(풍동수지동)               月昇水波昇(월승수파승)     범어스님은 원래 시에는 능하지 못한 편..

김삿갓 이야기 2024.12.01

80. 요강

80. 요강    황진이 무덤 찾기를 단념한 김삿갓은 고려의 도읍지 松都(송도)로 가던    길에 철쭉꽃이 많기로 유명한 進鳳山(진봉산)에 올라 지금 한창 제철을    만나 흠뻑 피어 있을 철쭉꽃을 보기로 했다.     자고로 鳳山躑躅(봉산척촉)이라 하여 송도팔경의 하나라더니 과연 허언    이 아니었다.     꽃에 취한 김삿갓은 삼국유사의 獻花歌(헌화가)에 나오는 고사처럼 水路    夫人(수로부인)에게 라도 받치려는 듯 벼랑에 핀 꽃을 겪으려다가 그만    실족하여 발목을 심하 게 삐고 말았다.     아픈 다리를 끌고 내려오다가 다행히 한 스님을 만나 泉石寺(천석사)라    는 산사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 절의 주지 梵魚(범어)스님은 김삿갓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작년에 금강산에..

김삿갓 이야기 2024.11.30

79. 황진이 무덤은 찾을 길 없고

79. 황진이 무덤은 찾을 길 없고    그로부터 2,3일 동안 김삿갓은 長湍(장단) 땅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    지만 황진이무덤은 찾을 수 없었다.     하찮은 벼슬아치들의 무덤들은 잘도 알면서 천하명기 황진이의 무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아, 이렇게까지 애를 써도 황진이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으니 아마도 황    진이와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가 보구나.     김삿갓은 마침내 황진이의 무덤에 술 한 잔 부어놓고 그 넋을 위로하려던    뜻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처량한 생각이 들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니 저 멀리 산골자기에는 매화꽃이 곱게 피어 있고,     개울가에는 버드나무숲속에서 꾀꼴새가 영절스럽게 울어 대..

김삿갓 이야기 2024.11.29

78. 황진이 묻혔다는 장단고을

78. 황진이 묻혔다는 장단고을    임진나루를 건너 얼마를 더 가니 거기부터는 長湍(장단) 땅이라고 한다.     장단이라면 松都名妓 黃眞伊(송도명기 황진이)가 묻혀 있다는 그 곳이 아니    던가.     일직이 宣祖(선조) 때 풍류시인 白湖 林悌(백호 임제)가 平安道評事(평안도    평사)가 되어 부임 해 가다가 찾았다는 바로 그 무덤이다.     어찌 그 장단고을을 지나면서 황진이 무덤을 찾지 않을 수 있으랴.     나도 백호처럼 그의 무덤에 술 한 잔 부어 놓고 시 한 수 읊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유유히 걸으면서 백호가 읊었다는 시조창을 길게 뽑아 본    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

김삿갓 이야기 2024.11.28

77. 벽제관을 지나 임진포로

77. 벽제관을 지나 임진포로    말을 빌려 탔던 아이에게서 조금만 더 가면 碧蹄館(벽제관)이라는 말을 들은    김삿갓은 불현듯 임진왜란의 고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宣祖(선조)는 의주까지 피난하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구원병을     몰고 온 李如松(이여송)은 평양과 송도를 차례로 탈환했으나 벽제에서 패하    였다.     승승장구하던 이여송이 벽제에서 혼이 나자 송도로 물러나서 좀처럼 싸우    려 하지 않았다.     지혜롭기로 유명했던 漢陰 李德馨(한음이덕형)이 여러 차례 나가 싸우기를    권유하다가 화가 나서 이여송의 방에 둘려 있는 赤壁圖(적벽도) 병풍에 다음    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갈겼다.               승부란 한 판의 바둑과 같은 것          ..

김삿갓 이야기 2024.11.27

76. 馬上逢寒食(마상봉한식)

76. 馬上逢寒食(마상봉한식)    이산 저산에 모두가 꽃이었다. 삿갓을 제겨 쓰고 꽃구경을 하며 마냥 한가     롭게 거닐고 있노라니까 저만큼 풀밭에서 여남은 살 먹어 보이는 머슴아이     가 조랑말을 끌고 다니며 풀을 뜯기고 있었다.     김삿갓은 말을 보자 옛날 絶句(절구) 한 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났는데               오다 보니 어느새 봄이 저무네.               馬上逢寒食(마상봉한식)               途中送暮春(도중도모춘)     말을 타고 봄을 즐기며 九十春光(구십춘광)을 馬上(마상)에서 보낸다는     소리다. 옛날 사람 들은 나들이 할 때에는 흔히 말을 타고 다녔다.     그러기에 김삿갓 자신도 말을 타고 ..

김삿갓 이야기 2024.11.26

75. 무악재의 봄

75. 무악재의 봄    서울을 벗어난 김삿갓은 발길을 毋岳(무악)재로 돌렸다.     坡州(파주), 長湍(장단) 등지를 거처 고려500년의 망국지한이 서려있는 松    都(송도; 개성)로 가보려는 것이었다.     무악재에 올라서니 넓은 산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우울하던 가슴이 탁    트여오는 것만 같았다.     때는 봄인지라 산에는 군데군데 진달래꽃이 만발해 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초가집 울타리에 노랗게 피어난 것은 개나리꽃이 분명하리라.     어느새 버들가지는 실실이 늘어져 있었다.               봄 성에는 가는 곳마다 꽃잎 날리고               한식 봄바람에 버들가지가 휘늘어졌네.               春城無處不飛花(춘성무처불비화)             ..

김삿갓 이야기 2024.11.25

74. 서울 木覓山(목멱산;지금의 남산)

74. 서울 木覓山(목멱산;지금의 남산)    남한산성을 떠난 김삿갓은 왕십리을 거처 머릿속으로만 상상해 보던 서울     장안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서울거리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리거리 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분주한 시장 판에    는 오만가지 물건들을 늘어놓고 제각기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이것저것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날은 저물어 하룻밤의 잠자리를 구해야 했    지만 절간이나 서당이 어디 있는지는 알 길이 없고,     부득이 여염집 신세를 저야 할까본데 집이라는 집은 모두 대낮부터 대문을    겹겹이 닫아걸고 있지 않는가.     문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관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낮    에..

김삿갓 이야기 2024.11.24

73. 치욕의 남한산성

73. 치욕의 남한산성    김삿갓은 三田渡(삼전도)에서 청태종 공덕비를 보는 순간 병자호란의 치욕    이 번개 처럼 머리를 때렸다.     우리의 임금 인조가 세자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소위 受降壇(수강단)이라    는 높은 단 위에 오만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저 북녘 오랑캐 청태종에게 三拜    九叩頭 (삼배구고두)를 했던 바로 그 자리가 아니던가.     항복을 받은 후에 그들은 왕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하고 무고한 백성을     50만 명이나 포로라는 이름으로 잡아가면서도 皇恩(황은)이 망극함을 감사    하라 면서 항복을 받았던 그 자리에 소위     >를 세우라고 하여 온 조정과 백성이 울면서 세운 그 비석이다.     먼저 비문의 초안을 써 받치라고 해서 張維(장유)등 대신들에게 쓰게 하..

김삿갓 이야기 2024.11.23

72. 봄은 다시 오건만

72. 봄은 다시 오건만    原州(원주)에서 驪州(려주), 利川(이천)을 거처 廣州(광주) 땅에 이르렀을 때    는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세상에 속일 수 없는 것이 계절의 감각이어서 엊그제까지도 산길을 걷자면     추위를 느꼈건만 立春(입춘)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언덕길을 올라가려면 등    골에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산길을 홀로 걷던 김삿갓은 문득 白樂天(백악천)의 봄에 대한 시를 연상하였    다.               버들은 힘이 없는 듯해도 가지가 움직이고               못에는 물결이 일며 어름이 녹아나네.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봄바람과 봄물이 한꺼번에 오는구나.           ..

김삿갓 이야기 2024.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