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州(원주)에서 驪州(려주), 利川(이천)을 거처 廣州(광주) 땅에 이르렀을 때 는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세상에 속일 수 없는 것이 계절의 감각이어서 엊그제까지도 산길을 걷자면 추위를 느꼈건만 立春(입춘)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언덕길을 올라가려면 등 골에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산길을 홀로 걷던 김삿갓은 문득 白樂天(백악천)의 봄에 대한 시를 연상하였 다.
버들은 힘이 없는 듯해도 가지가 움직이고 못에는 물결이 일며 어름이 녹아나네.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봄바람과 봄물이 한꺼번에 오는구나. 柳無氣力枝先動(류무기력지선동) 池有波紋氷盡開(지유파문빙진개) 今日不知難計會(금일불지난계회) 春風春水一時來(춘풍춘수일시래) 산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가고 오는 세월의 발자취 소리가 귓가에 역력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감흥이 그토록 절실하기에 김삿갓은 자신도 한 수의 시가 없을 수 없었다.
해마다 해마다 해는 가고 끝없이 가고 날마다 날마다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는 가고 날은 오고 오고 또 가는데 천시와 인사가 모두 그 속에서 이루어지네. 年年年去無窮去(년년년거무궁거) 日日日來不盡來(일일일래부진래) 年去日來來又去(년거일래래우거) 天時人事此中催(천시인사차중최)
이 시는 스물여덟 자 밖에 안 되지만 그 중에 年(년), 日(일), 去(거), 來(래) 자가 각각 넉 자씩 모두 열여섯 자로 이루어졌으니
똑 같은 글자를 네 번씩이나 반복해 가면서 天地(천지)의 流轉(류전)을 이토 록 간단명 료하게 표현한 수법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처럼 김삿갓은 천지에 무르익어 오는 봄빛을 마음껏 완상하며 길을 무 심 히 걸어오다 보니 三田渡(삼전도;지금의 송파) 길에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 제공덕비)라는 커다란 비석이 눈에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