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은 三田渡(삼전도)에서 청태종 공덕비를 보는 순간 병자호란의 치욕 이 번개 처럼 머리를 때렸다.
우리의 임금 인조가 세자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소위 受降壇(수강단)이라 는 높은 단 위에 오만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저 북녘 오랑캐 청태종에게 三拜 九叩頭 (삼배구고두)를 했던 바로 그 자리가 아니던가.
항복을 받은 후에 그들은 왕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하고 무고한 백성을 50만 명이나 포로라는 이름으로 잡아가면서도 皇恩(황은)이 망극함을 감사 하라 면서 항복을 받았던 그 자리에 소위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를 세우라고 하여 온 조정과 백성이 울면서 세운 그 비석이다.
먼저 비문의 초안을 써 받치라고 해서 張維(장유)등 대신들에게 쓰게 하여 瀋 陽(심양) 에 보냈으나 그것으로는 미흡하다 하여 다시 써 보내게 되었고,
그 때 仁祖(인조)는 문장력이 좋은 李景奭(이경석)(호: 白軒(백헌) 당시 부제 학)에게 명하여 부 득이 본의 아니게 치욕의 글을 천추에 남긴 이경석은 한 평생 글 배운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글 배운 것을 한탄하기로 하면 김삿갓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글재주가 아니었던들 영월백일장에서 자기 할아버지를 매도하는 글로 장원 급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남한산성 문루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문 득杜甫(두보)의 시를 연상하였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 있어 봄이 오니 산성에 초목이 무성하구나. 느끼는 바 있어 꽃에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라노라.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春城草木深(춘성초목심)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나라가 망한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그는 이곳에서 병자호란의 치욕 적 인 역사를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호를 淸(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청태종은 인조 14년(1636, 병자년) 에 십만대군을 이끌고 12월 2일 심양을 출발하여 14일에는 개성을 점령하고 16일에는 선봉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기 시작했으니 불과 두 이레만의 일 이 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불과 40년이요,
10년 전 정묘호란 때도 왕이 강화도까지 蒙塵(몽진)하는 곤욕을 치르면서 저 들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지 않았던가.
그 동안 전쟁위협을 수 없이 받았고 그들의 침공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는 데 朝野(조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당시 남한산성에는 13,000 명의 군사와 50일분의 식량이 있었다.
명나라에 急使(급사)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고 8도에 勤王兵(근왕병)(임금 에게 충성을 받치는 군사)을 모집하는 격문을 붙였으나,
제 코가 석자나 빠진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낼 리 없었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달려오는 용맹한 근왕병도 없었다.
45일이 지나면서 성 안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항복하자는 主和論(주화론) 과 다함께 죽을지언정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斥和論(척화론)이 대립하여 입씨름만 하고 있을 뿐,
10만대군의 포위 속에 고립된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친 김삿갓은 한숨을 푸-푸- 쉬면서 무거운 발 거름으로 산성을 돌아보았다.
김삿갓이 오늘의 우리현실을 보았으면 무어라고 했을까.
전쟁위협은 그 때와 다를 바 없는데 한미공조냐 민족공조냐 하고 공론만 분 분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