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이야기 120

91. 장 기

91. 장 기    개성을 벗어나 북으로 올라가니 바로 황해도 땅이다. 황해도 曲山(곡산)의    천동 마을이 김삿갓의 마음의 고향이다.     할아버지 金益淳(김익순)이 대역죄를 입어 가문이 파멸될 때 어머니의 등    에 업혀 머슴의 고향이던 곡산의 천동마을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서울에서 산 기억은 너무 어려서 나지 않고, 그 이후로도 영월로    갈 때까지 양주, 광주 등지를 전전했었지만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별    로 기억이 없으며,     오직 황해도 곡산의 천동마을만이 기억에 생생하여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었다.     천동마을에는 본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꺾쇠, 왕눈이, 개똥이 하고 별명    으로 부르던 친구들은 산과 들로 싸다니며 뛰놀기도 했고,     ..

김삿갓 이야기 2024.12.11

90. 개다리소반에 죽 한 그릇

90. 개다리소반에 죽 한 그릇    산에서 내려오던 나무꾼 변서방은 절을 묻는 김삿갓에게 절을 찾아가기엔    너무 늦었으니 누추하지만 자기 집으로 가자고했다.     산기슭의 단칸 움막에 가재도구라고는 방 한복판에 놓인 화로 하나가 있을    뿐인데 그나마 마누라가 없는 탓인지 불씨마저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그 화로라는 것이 커다란 통나무 뿌리를 캐어다가 아무렇게나 잘라 만든것    이어서, 모양새가 얼른 보기엔 호랑이 대가리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고    래가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괴상하게 생긴 화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삿갓은 빙그레 웃고 나서 즉흥    시 한 수를 읊었다.               머리는 호랑이요 입모양은 고래지만           ..

김삿갓 이야기 2024.12.10

89. 산 이름은 송악인데

89. 산 이름은 송악인데    개성시내 곳곳의 유적을 안내하면서 자기 집에 유숙케 하는 선비의 친절은    고맙지만 가난해 보이는 선비 집에 여러 날 머물러 있을 수도 없어서 만류를    무릅쓰고 작별을 고하고 나왔다.     그러나 어제 보았던 단풍으로 곱게 물들은 그 松嶽山(송악산)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千紫萬紅(천자만홍)을 한 눈으로 바라보며 송악산을 서서히 올라갔    다 내려오니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개성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가야겠기에 이집 저집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거    절이다.     한 집은 여자만 있어서 안 된다 하고, 또 한 집은 과객을 재울 방이 없다고 하    더니 또 다른 집은 땔 나무가 없어서 안 된다고 한다. 원 이런 놈의 ..

김삿갓 이야기 2024.12.09

88. 고려궁의 정원 만월대

88. 고려궁의 정원 만월대    松嶽山(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滿月臺(만월대)는 고려조의 正宮(정궁)    이었던 延慶宮(연경궁) 앞의 널따 란 정원의 이름이었다.     고려국이 태평성대였을 때 임금님은 밤이면 궁녀들을 거느리고 정원을 거    닐며 달구경을 즐겼기에 정원의 이름을 만월대라 했다.     만월대 주변에는 정궁인 연경궁을 비롯하여 會慶殿(회경전), 長和殿(장화    전), 元德殿(원덕전), 乾德殿(건덕전), 萬齡殿(만령전), 八仙殿 (팔선전) 등    등 수많은 궁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을 뿐 아니라 뜰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하였고,     나무 숲 사이로는 宮服(궁복)을 곱게 차려 입은 궁녀들의 내왕도 빈번했었    다.     그러나 지금은 궁전을 떠받치고 있던 주춧돌만 여..

김삿갓 이야기 2024.12.08

87. 망국의 한

87. 망국의 한    笑離亭(소리정)에서 만난 선비와 이런 일 저런 일들을 이야기하며 무심히     발길을 옮겨 놓다보니     어느덧 開城(개성)의 鎭山(진산)인 松嶽山(송악산)이 멀리 바라보인다.     5백년 도읍지를 이제야 구경하게 되었구나 싶어 벌서부터 감개가 무량해진    김삿갓은 고려조의 충신이요,     圃隱(포은), 牧隱(목은)과 더불어 麗末三隱(려말삼은)으로 일컬어지는 冶隱    (야은) 吉再(길재)선생의 시조 한 수를 읊조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김삿갓이 야은의 시조를 읊어 보이자 같이 걷던 선비는 크게 기뻐하면서 李  ..

김삿갓 이야기 2024.12.07

86. 소리정에서

86. 소리정에서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다. 하물며 사모하는 여인과의 이별에    있어서이랴.     안산댁은 생각할수록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마음이 비단결 같이 고와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얼마를 걷다보니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조차 괴이      한 笑離亭(소리정)이라 했다.     소리정? 옛날에 어떤 風客(풍객)들이 헤어지기가 하도 아쉬워 이왕이    면 웃으면서 헤어지자고 이름을 소리정이라 했나보다.     정자에 오르니 「참다운 인연이면 그만이지 그 외에 또 무슨 꿈이 필요    하 겠느냐」고 한 안산댁의 전별시가 다시 머리에 떠올라 그리움이 사    무치는 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정자에는 ..

김삿갓 이야기 2024.12.06

85. 안산댁과의 이별

85. 안산댁과의 이별    김삿갓이 進鳳山(진봉산) 泉石寺(천석사)에 머문 지도 어언 한 달이 넘었    고 다친 다리도 안산댁의 극진한 간호로 다 나았으니 이제는 떠나야 했다.    범어스님과 안산댁이 한사코 말렸지만 김삿갓은 훌훌 털고 산사를 내려    왔다.     안산댁이 못내 아쉬워하면서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지만, 정처 없이 떠돌    아다니는 나그네가 어디로 갈지를 어찌 미리 알겠느냐고 대답하고,     자기의 생활철학과 인생행로를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시로서 惜別(석별)의    정을 표하였다.               솔바람 차게 부는 쓸쓸한 주막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속세를 떠난 사람               산골이 가까우면 구름으로 벗을 삼고          ..

김삿갓 이야기 2024.12.05

84. 신세타령

84. 신세타령    김삿갓의 다친 발목이 거의 나아서 지팡이를 짚고 걷기 시작할 무렵,     梵魚(범어)스님은 아직 혼자 걷기는 불편하리라면서 '安山宅(안산댁)' 이라    는 미모의 젊은 여인을 보조자로 천거해 주었다.     안산댁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이 절에 단골로 다니기 시작한 여신도     인데 글도 잘하는 편이니 말동무가 될 것이라 했다.     김삿갓은 그 날부터 안산댁의 부축을 받아가며 하루 두세 시간씩 보행연습     을 하였다.     안산댁은 어떻게나 행동거지가 얌전하면서도 민첩한지 김삿갓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날마다 거름걸이가 좋아지고 있었다.    다리에 신경을 적게 쓰게 되면서 대화가 늘어났고,     김삿갓의 짓궂은 물음에도 안산댁은 ..

김삿갓 이야기 2024.12.04

83. 「붓」

83. 「붓」    범어스님은 또다시 "전번에는 종이에 대한 시를 지어 주셨으니 이번에는    붓에 대한 시를 한 수 지어 달라"고 했다.     김삿갓은 다시 범어의 청을 들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네 친구가 서로 어울리되 너 만을 君이라 함은               고금의 문장을 너만으로 쓰기 때문이리라.               출세하고 낙오함도 네 힘에 달려 있고 영리하고               우둔함도 네 혀끝에 달렸도다.               四友相須獨號君(사우상수독호군)               中書總記古今文(중서총기고금문)               銳精隨世昇沈別(예정수세승침별)               尖舌由人巧拙分(첨설유인교졸분)     #(文房四友중..

김삿갓 이야기 2024.12.03

82. 『종이』

82. 『종이』    범어스님은 김삿갓이 누어있는 기회에 시를 배우려고 틈이 날 때마다 가르    쳐 달라고 졸라 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며 지난번에는 창구멍을 막는 시     를 지으셨으니 이번에는 종이에 대한 시를 한 수 지어 달라고 했다.     김삿갓은 범어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지어 주었다.               넓적한 등전지는 본래 나무로 만든 물건               펼쳐 놓고 글을 쓰면 글씨가 가볍도다.               천권 책을 모두 읽고 차곡차곡 쌓으면               그 높이 하늘 아래 만리로 뻗으리라.               闊面藤霜本質情(활면등상본질정)               鋪來當硯點毫輕(포래당연점호경..

김삿갓 이야기 2024.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