梵魚(범어)스님은 아직 혼자 걷기는 불편하리라면서 '安山宅(안산댁)' 이라 는 미모의 젊은 여인을 보조자로 천거해 주었다.
안산댁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이 절에 단골로 다니기 시작한 여신도 인데 글도 잘하는 편이니 말동무가 될 것이라 했다.
김삿갓은 그 날부터 안산댁의 부축을 받아가며 하루 두세 시간씩 보행연습 을 하였다.
안산댁은 어떻게나 행동거지가 얌전하면서도 민첩한지 김삿갓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날마다 거름걸이가 좋아지고 있었다.
다리에 신경을 적게 쓰게 되면서 대화가 늘어났고,
김삿갓의 짓궂은 물음에도 안산댁은 수줍은 미소를 감추지 않으면서 재치 있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산댁은 부축을 멈추고 뒤 따라 오면서 김삿갓을 홀로 걷 게 했다.
김삿갓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다가 뒤돌아보면서 "이제는 안산댁과도 헤어 질 때가 되어 가는가 보다"고 했고,
안산댁은 당황한 빛을 보이며 한참을 걷다가 "佛經(불경)에 會者定離(회자 정리)라는 말이 있더니 만난사람은 반듯이 헤어져야 하는가 봅니다."하고 탄식에 가까운 말을 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자기도 안산댁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지만 안산댁도 자기에 대 해 궁금한 것이 많은 듯,
이것저것 조심스럽게 물어 볼 때마다 농담으로 얼버무렸던 것이 미안해서 헤어지기 전에 자기의 정체를 조금은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自顧偶吟(자 고우음)이 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웃으며 푸른 창공 바라보니 앉아서도 닿을 듯한데 지나온 길 돌아보니 더욱 멀고 아득하구나. 가난하게 사니 매양 집안사람의 불평만 듣고 어지러이 마시니 저자거리 아낙에게 조롱 받기 일쑤일세. 笑仰蒼穹坐可迢(소앙창궁좌가초) 回思世路更迢迢(회사세로경초초) 居貧每受家人謫(거빈매수가인적) 亂飮多逢市女嘲(란음다봉시녀조)
이 세상 모든 일을 落花 보듯 바라보며 평생을 달밤처럼 흐릿하게 살아왔소 나의 인생 하는 일이 기껏 이 뿐이니 청운의 뜻 내 분수 밖임을 점차 깨달았다오. 萬事付看花散日(만사부간화산일) 一生占得明月宵(일생점득명월소) 也應身業斯而已(야응신업사이이) 漸覺靑雲分外遙(점각청운분외요)
김삿갓은 신세타령의 시를 읊으면서도 안산댁이 그 뜻을 알아줄까 저어하 였다.
그러나 안산댁은 "선생님의 시는 너무 허망하옵니다."하고 한숨을 쉬면서 한참을 걷더니
"선생님은 이 나라에 잘못 태어나신 듯싶습니다. 중국에 태어나셨더라면 李太白(이태백)이나 杜子美(두자미)처럼 만인의 숭앙을 받았을 것인데 이 나라에서는 선생님을 몰라보고 있습니다." 하여 김삿갓을 다시 한 번 놀라 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