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이 야은의 시조를 읊어 보이자 같이 걷던 선비는 크게 기뻐하면서 李 芳遠(이방원)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쳤던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선생의 시조로서 화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윽고 선비가 안내한 곳은 善竹橋(선죽교)였다. 그 곳에는 백성들이 선생의 충절을 기려서 그의 핏자국이라고 일러오는 붉 은 돌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
어느 누구도 당당하게 그를 추모하는 시 한 수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 다면서 선비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무명시인의 시 한수를 소개했다.
산천은 옛 대로인데 거리는 비어 있고 저녁놀 잠긴 곳에 물소리만 처량하다 홀로 말 세우고 옛 자취 찾아보니 꺾인 비석에 정문충만 남아 있네. 山河依舊市朝空(산하의구시조공) 流水殘雲落照中(류수잔운락조중) 歇馬獨來尋往迹(헐마독래심왕적) 斷碑猶記鄭文忠(단비유기정문충)
망국의 설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시였다. 조선왕조 초에는 나라의 忌諱(기휘)가 두려워 포은의 충절을 누구도 예찬하 지 못했다는 것은 알만한 일이다.
炎凉世態(염량세태)란 본시 그런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김삿갓은 나라의 기휘가 두려워 시흥을 묵살하는 겁쟁이는 되고 싶 지 않아 한 수 읊었다.
옛 강산에 말 멈추니 시름은 새로운데 오백 년 왕업에 빈터만 남았구나. 연기 어린 담장 가에 까마귀 슬피 울고 낙엽 지는 폐허에 기러기만 날아가네. 故國江山立馬愁(고국강산립마수) 半千王業一空邱(반천왕업일공구) 煙生廢墻寒鴉夕(연생폐장한아석) 葉落荒臺白雁秋(엽락황대백안추)
돌로 된 짐승은 오래 되어 말이 없고 구리 대는 쓰러져 머리를 숙였구나. 둘러보아 유난히 가슴 아픈 곳은 선죽교 아래 냇물 흐름 없는 흐느낌이네. 石狗年深難傳舌(석구년심난전설) 銅臺陀滅但垂頭(동대타멸단수두) 周觀別有傷心處(주관별유상심처) 善竹橋川咽不流(선죽교천인불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