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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대담

eorks 2020. 1. 29. 20:18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대담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설전? 雪戰!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한국 근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 두 분은 속세의 나이와 승려로서의 나이 모두 20년 차이가 난다. 법정은 성철을 불가의 큰 어른으로 따랐다. 성철은 제자와 후학들에게 대단히 엄격하면서도 유독 법정을 인정하고 아꼈다.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는 <설전>(책읽는섬. 2016)은 두 큰 스님이 나눈 대화와 둘 사이의 일화를 엮은 책이다. 제목 설전은 말다툼을 뜻하는 舌戰이 아니라 雪戰으로 표시한다. 책 뒷날개에 그에 대한 설명 글이 있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눈의 성질로 수행자의 냉철하고도 온화한 자세를 형상화 했다. 또한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이미지를 통해 성철과 법정 사이의 구도의 문답을 표현하고자 했다.” (일부 수정)

 

책에는 성철 불교의 본질을 끌어내는 법정의 질문과 거기에 답하는 성철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성철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원택의 증언이 더해졌다.

 

법정이 해인사 강원에 머물던 1967, 성철은 해인사 해인총림 초대 방장에 추대된다. 성철은 그 해 124일부터 100일 동안 설법에 들어간다. 이것을 백일법문(百日法門)’이라고 한다. 수많은 승려와 불자가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 든다.

 

이때 법정은 아주 원론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무엇을 불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정말 사람이 성불할 수 있습니까?” 같은 불교의 초심자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가야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던 성철은 법정의 질문에 일일이 답한다. 결국 이러한 질문은 성철의 설법이 대중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 ‘불교佛敎에서 은 부처님이고 는 가르침이니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은 인도말로 붓다Budda이고 깨친 사람이라는 뜻이니, 이 세상 모든 이치를 일체만법一切萬法의 근본 자체를 원만하게 깨친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것이겠지요.

 

불교는 일체만법을 깨친다는 것에 근본 의의가 있으니 깨친다는 데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서 불교를 논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27)

 

책은 1982년 벽두에 한 언론사의 주선으로 만난 성철과 법정의 대담도 실었다. 두 스님은 자아를 닦는 일상의 수행법과 불교의 근본적인 정신, 지도자의 덕목, 물질만능 시대의 인간성 회복 문제, 권력과 이념에 편승하지 않는 언론, 미래가 꺾인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눈다.

 

“(출가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수행하는 기간 동안에는 세속을 버리고 사는 것 같지만, 근본 목적은 성불해서 중생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92)

 

그들의 대화는 선승이 세상과 떨어져 홀로 수행만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없애준다. 그들도 타인과 세상을 위해 살아갔으며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한 시대의 정신을 상징했던 두 스님이 나눈 이야기가 깊은 울림을 준다.

 

근현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대중의 스승인 법정과 성철은 속세의 나이와 승려로서의 나이 모두 정확히 20년 차이가 난다. 법정이 출가하기 한 해 전인 1955년에 성철은 이미 초대 해인사 주지에 임명될 정도로 명성과 인망이 자자했다. 법정은 성철을 불가의 큰 어른으로 따랐으며, 성철은 뭇 제자와 후학들에게 대단히 엄격하면서도 유독 제자뻘인 법정을 인정하고 아꼈다.

 

설전은 성철과 법정이 나눈 대화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인연의 흔적들을 발굴하여 처음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성철 불교의 본질을 끌어낸 법정의 지혜로운 질문과 거기에 화답하여 인간 존재와 현상의 심층을 드러내는 성철의 대답이 담겨 있으며, 성철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했던 원택의 증언이 더해져 성철과 법청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과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담긴 내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법정스님 : 큰 스님 모시고 대담을 갖기 위해, 안거 중인데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흔히 밖에서 말하기를 큰스님 뵙기가 몹시 어렵다고들 합니다. 스님을 뵈려면 누구나 부처님께 3천 배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째서 3천 배를 하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 계실 때부터 그런 가르침을 시행하게 되셨습니까? 

성철스님 : 흔히 3천 배를 하라 하면 나를 보기 위해 3천 배를 하라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면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느 점으로 보든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남을 이익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3천 배 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자신을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3천 배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변화가 오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하는 것이 잘 안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정스님: 요즘 세태를 보면 날이 갈수록 인간사회가 험악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사회에서 존엄의 터전으로 내려온 기존의 가치체계나 규범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철스님 : 그렇게 되는 그 근본책임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는 정신적인 지도역할을 맡고 있는 종교인에게 있다고 봅니다. 살인, 강도 등 범죄가 있다면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신적인 지도책임을 맡고 있는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참다운 지도를 하지 못하고 참다운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근본책임이 종교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그렇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독립된 현상만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희들 자신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 : "종교인에게도"가 아니지요. "에게도"가 아니고. 실제로 책임은 근본 책임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인이란 정신을 지도하는 근본책임을 맡았으니, 예전 스님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극중한 죄인은 내가 아니고 누구냐'고 했습니다. 종교인 자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종교인이라는 사람, 성직자라는 사람부터 근본 자세를 바로 잡아서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의 정신적 지도부터 잘못되었다고 하면 밑에서 지도 받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 근본책임을 맡은 종교인, 성직자인 우리가 참회해야 한다고 봅니다.

 

 

법정스님: 세계의 많은 학자들, 특히 토인비 같은 역사가는 현대 문명의 해독제로서 불교사상을 크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야말로 인류 구제의 길잡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오늘의 인류에게 기여하기 위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철스님 :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무슨 불교를 잘 안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한도에서 말하자면,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데 있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그리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여기에 우리 불교의 근본이 서 있습니다. 성불한다고 하여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실은 방편설입니다.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는 것은 부처 아닌 중생을 부처로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세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본래 부처인 이것을 바로 보고, 현실이 본래 절대 극락세계인 이것을 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방편으로 서방의 극락세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감고 잘 모르니, 어떠한 표준을 말하기 위해서 서방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조 스님 말씀에 '동방 세계 사람이 염불해서 서방 세계에 간다면 서방 세계에 있는 사람은 염불해서 어디로 가느냐?' 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좋은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본래 광명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자체가 본래 광명입니다. 전체가 본래 부처고 전체가 본래 극락세계인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섬기자' 이것입니다.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 섬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불교 믿는 처음 조건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셔라, 모든 존재를 부모로 섬겨라,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겨라 하는 3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 생활을 불공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상대가 부처인 줄 알면서 부처님으로 섬기고 존경하고 봉양한다면 극락세계를 따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대로가 극락세계가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는 이것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법정스님: 스님께서 한창 정진하시던 것과, 요즈음 선원이나 강원에서 스님들이 처신하는 것을 견주어 보시면 생각이 많으실 줄 믿습니다 어린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진실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성철스님 : 출가한 사람이란 무엇이 목적이냐 하면, 결국 대법을 성취하여 일체를 위해 사는 인격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개인주의여서는 안됩니다. 출가의 목적에서 볼 때, 참으로 큰 활동을 하기 위해 세속을 버리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수행하는 기간 동안에는 세속을 버리고 사는 것 같지만, 근본 목적은 성불해서 중생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를 위해서 수행하고 자기를 위해서 견성한다면 그것은 외도입니다. 수행도 남을 위해서 하고 나중 생활도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 이것이 불교의 출발이자 종점인데 요즘 가만히 보면 세속적으로도 정신 방면이 소외되고 물질 본위로 치중되고 있듯이 우리 불교도 그런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흔히 공부하는 스님들이 와서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공부하는 데 5계를 한번 지켜보라고 하지요.

 

 

첫째, 잠을 적게 잔다. 세 시간 이상 더 자면 그건 수도자가 아니지요. 둘째, 말하지 말라, 말할 때는 화두가 없으니 좋은 말이든 궂은 말이든 남과 말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끼리는 싸움한 사람같이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든 말하지 말라.

 

 

셋째, 문자를 보지 말라. 부처님 경도 보지 말고 조사 어록도 보지 말고, 신문 잡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참선하여 자기를 복구시키면, 이 자아라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다해도 설명할 수 없고 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어떤 문장이나 부처님이라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아를 완전히 깨치려면 불법도 버려야 합니다. 불교를 앞세우면 그것이 또 장애가 됩니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에게 비춰보면 먼지요, 때다 그 말이지요. 오직 화두만 해야 합니다.

 

 

넷째, 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음식은 건강이 유지될 정도만 먹지, 과식하면 잠이 자꾸 오고 혼침해서 안됩니다. 소식이 건강에도 좋고 장수비결입니다.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 해재하면 모두 제트기같이 달아나는데 그러지 말란 말이지요. 5계를 지키며 이렇게 10년을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법정스님: 스님의 생활신조라고 할까, 좌우명 같은 것을 들려주십시오.

 

 

성철스님 : 내가 늘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습니다. 쇠말뚝을 박아 놓고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꽂혀있습니다. 거기에 패가 하나 붙어있어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영원한 진리'하면 막연하지요. 내가 불교인이니 그것은 불교밖에 없는가 하고 혹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견문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더러 책을 읽어보았는데 불교가 가장 우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교를 그대로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라도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이 옷을 벗겠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진리를 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내 기본 자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진리를 위해서 산다는 이 근본 자세는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진리에 살려면 세속적인 일체 명리는 다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앞서면 진리는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니, 그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승려가 될 때는 신조가 있는데 여하한 일이든지, 세간 일이든지, 출세간 일이든지, 절일이든지, 사회적인 문제든지, 일체 관여치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슨 회의든지 참여 안 한다. 그래서 절의 모임이나 사회의 모임에 참석해 본 일이 없습니다.

 

 

법정스님: 스님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준 서책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성철스님 : 내가 여러 가지 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로 한 것은 선()입니다. 내가 제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조사 스님네의 어록은 "조주록""운문록"입니다.

 

 

법정스님: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철스님 : "보현행원품"입니다. 행원품이란 모든 존재의 실상 그대로 그 자체 모든 일체가 절대라는 것을 분명하고도 해박하게 설명해 놓은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 일체가 부처이니 자기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거룩한 길이 거기 있습니다. "화엄경"하면 불교의 근본인데, "행원품"은 바로 그 "화엄경"의 엑기스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불교 활동하는 데에도 행원품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스님께서는 어떤 인물을 존경하십니까?

 

 

성철스님 : 인류 역사상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도 참으로 많지만, 내가 볼 때는 참으로 자아 회복을 하여 그 문제를 우리에게 소개한 분은 부처님이시고, 그 뒤에 와서는 육조 스님이 계시지요.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 사바가 본래 극락이라는 것, 정토라는 것, 현실이 그대로 절대라는 그 소신을 가장 해박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분이 부처님과 육조 스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법정스님: 사람은 한 번은 죽습니다. 많은 생물 가운데서 유달리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는 모든 종교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스님의 생사관을 듣고 싶습니다.

 

 

성철스님 : 모를 때는 생사지만 알고 보면 생사란 본래 없습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캄캄하다가도 눈을 뜨면 온천지가 광명인 것과 같이. 생사 이대로가 열반(涅槃), 즉 자유요 해탈입니다. 일체 만법(萬法)이 해탈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방편으로 볼 때는 윤회를 말하지만 윤회도 눈감고 하는 소리지요. 눈을 뜨고 보면 자유가 있을 뿐 윤회는 없습니다. 생사 밖에서 해탈을 구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눈을 감은 사람이지요. 그러니 행복을 딴 데서 구하지 말고 이 현실을 바로만 보면 지상이 곧 극락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육신은 옷에 비유할 수 있어요. 옷이 낡아 그 옷을 벗었다고 해서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잖아요.

 

 

저자 성철(속명 이영주)1912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졸업 후 독학하며 철학, 의학, 문학 등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독파했다. 20세가 지난 후 지리산 대원사에서 휴양하며 처음 불교를 접했다. 대원사 탑전에서 속인으로 ()자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한 지 40여 일 만에 마음이 밝아졌다. 1936년 봄, 해인사 백련암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같은 해에 운봉화상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1940년 대구 동화사에서 큰 깨우침을 얻고 오도송을 읊었다. 이후 엄격하고 철저한 고행을 통해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을 세우고 불교 이론과 실천 논리를 확립하며 한국 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67년 가야산 해인사 해인총림 초대 방장에 추대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1993114(양력) 열반에 들었다. 세수 82, 법납 58세였다.

 

 

법정(속명 박재철)193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3년을 수료하고, 1956년 당대의 고승 효봉을 은사로 출가하여 같은 해 사미계를 받고 1959년에 비구계를 받았다. 치열한 수행을 거쳐 교단 안팎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중 1975년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출간한 수필집 무소유가 입소문을 타면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 이후 펴낸 책들 대부분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수필가로서 명성이 널리 퍼졌다. 2010311, 길상사에서 78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대표작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물소리 바람소리, 홀로 사는 즐거움,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등이 있다.

 


......^^백두대간^^........白頭大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