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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한국에 귀화(歸化)한 일본인 김충선

eorks 2024. 4. 20. 13:26

  임진왜란 때 한국에 귀화(歸化)한 일본인 김충선

본관 김해. 자 선지(善之). 호 모하당(慕夏堂). 본명 사야가(沙也可).
임란왜란 때 왜군의 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때 나이 21살로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상륙했다.
선조25년 4월 13일이었다.
상륙한 지 일주일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에게 은밀하게 글을 보냈다.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고 내 군대가 약하지도 않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발달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
라를 짓밟을 수 없다.
그래서 귀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하여 울나라에 귀화해 장수가 된 그는 부산, 경주, 영천 등에 포
진하고 있던 왜군을 무찔렀다.
또 우리군대에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
군이 점령하고 있던 18개의 성을 되찾는 공을 세웠다.
그의 무공과 충절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불러 김해 김씨라는 성과 `충
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른 살 때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경상
도 달성군 우록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선조 36년 여진족의 노략을 막기 위해 내방소를 설치하고 그에게 북방
경비를 맡겼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자신이 10년 간 지켰던 북쪽 땅이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창의했다.
그때 나이 66세, 의병을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던 중 조정에서 항복을 결
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도 끝났구나."하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7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지중추부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호는 모하당, 상호군 경원, 부호군 계인의 아버지, 선전관 진명의 조부

대구사 달성군 우록(友鹿)마을. 대구 시내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
야트막한 산줄기에 둘러싸인 농촌 마을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사슴을 벗하며` 살고자 했던 김충선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모여 사는 `사
성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임금이 성(姓)을 내렸다 해서 `사성`(賜姓)이다.
현재 살고 있는 2백 여 호 가운데 50여 호가 이 가문이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들까지 따지면 4천명 가량이 될 것으로 짐
작된다.
족보상으로 어른 남자가 7백 여명, 그들의 아들이 1천3백 여명이다.

우록마을 입구에서 1백여m를 걸어가면 녹동서원이 나온다.
서원 뒤엔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 녹동사가 있다.
해마다 3월이면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넨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이 세상을 뜬 뒤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지었다.
`모하당`(慕夏堂:중국의 문명을 그리워함)이라는 호를 지을 정도로 유교
적 문물과 예의를 따랐던 김충선의 뜻을 기린 것이다.

이곳에서 느린 걸음으로 10분 가량 걸어 우록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왼편 건물에 `우봉역사도도서실`이라는 허름한 간판이 보인다.
두 평 남짓한 도서실 내부도 탁자와 의자 몇개, 한쪽 벽면을 반쯤 가린 책
장이 집기의 전부다.
그러나 이 남루한 공간에서 사야가 장군이 부할하고 있다.

국내엔 널리 알려지지도 않은 이 마을을 수많은 일본인들이 일삼아 찾아
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야가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서다.
우록마을이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니었다.
존재조차 부정되거나 매국노로 치부되던 사야가는 이때부터 명분 없는
침략저쟁을 거부한 인도주의자로 다시 살아났다.
`출병에 대의없다-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돌링 사나이`라는 다큐멘
터리를 제작한 것을 비롯해 각 언론이 앞다퉈 사야가를 재조명했다.
이런 열기는 정유재란 4백주년인 지난해 오사카와 교토에서 열린 심포지
엄 `왜 또다시 사야가인가`에까지 이어졌다.

***김충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녹동서원

"어영청에서 말씀 올리기를, 산행포수(山行砲手) 17명과 항왜군인(降
倭軍人) 25명을 지방진으로부터 데려와 본청에 두기로 한일은 이미 재
가를 받았습니다.
인솔한 대장은 항왜영장(降倭領將) 김충선인데 그 사람됨으로 말하면
담력과 용력이 뛰어났으나 성질은 매우 공손하고 근신합니다.
지난번 이괄의 반란 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달아난 괄의 부장 서아지
를 뒤쫓아가 잡는 일을 경상감사가 김충선에게 맡겼더니 아무런 수고로
움 없이 능히 이를 처치했습니다.
진실로 가상한 일입니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4월 23일)
그러나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정사에 없다.
그의 후손들이 엮어낸<모하당문집>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유일한 사료
이다.<문집>이 전하는 사야가 장군의 면모는 비범한 데가 있다.

"임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
국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저는 섬오랑캐의 천한 사람이요 바닷가의 보잘것없는 사나이입니다....
사람이 사나이로서 태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나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 나라에 나서 끝내 오랑캐로 죽게 된다면 어찌 영
웅의 한되는 일이 아니랴 하고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침식을 잊
고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사야가가 귀순하기를 청한 편지의 일부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22살의 나이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부
대의 선봉장이돼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다.
그러나 곧바로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이틀 뒤 침략의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백성들에게 돌린다.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은 이 글을 보고 안심하고 직업을 지킬 것이며 절대
로 동요하거나 흩어지지 말라. 지금 나는 비록 선봉장이 지만 일본을 떠나
기 전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너희 나라를 치지 않을 것
과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한결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떠나본 적
이 없기 때문이다."

사야가 장군은 화살 한번 쏘지 않은 채 4월 20일 편지를 띄워 귀순하게 된
다. 이후 부하를 거느리고 말머리를 돌려 왜군을 치고 조총과 화약 제조법
을 조선군에 전수했다.
선조로부터 종2품 가선대부 벼슬을 받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잇따라
공을 세웠다.
전란이 가라앉자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고 경상도 한 골짜기에 터
를 잡아 띠풀로 집을 지으니 나이 30살이었다.

***집성촌 우록마을 찾는 일본인 급증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전북 남원성에서 80여명의 도공을 납치해 일본으
로 데려갔다.
이들 가운데 심당길이란 도공이 있었다.
그의 후손들은 4백년 동안 한을 삭이며 도자기를 구웠고 심씨 가문의 도
자기는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로 뿌리내리기에 이르렀다.
그 14대 손이 도예가 심수관(72)씨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 장수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두 사건 사이엔 
6년의 간격이 있었다.
그리고 4백년이 흐른 뒤 엇갈린 운명의 조상을 둔 두 후손이 일본 땅에서
만났다.
그들은 모두 14대 손이었고 연배 차이도 6년이었다.
그때 도공의 후예는 "전쟁 때문에 조국을 바꾼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라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사야가 연구에도 열심이다.
오는 7월에는 서울에서 도자기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10~11월엔 일본 가고시마현에서 사쓰마 도자기 4백년 기념제를 대대
적으로 치른다.
이 행사에 사야가의 14대손도 초청됐다.

김재덕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뒤 사야가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여생을 바치고 있다.
사야가에 관심 가진 이들로 `한일역사공동연구회`라는 모임을 꾸렸다.
회비를 내는 회원이 2백여명이다.
대부분 일보인들인 점이 아쉽다.
다행히 할아버지를 돕겠다는 젊은이들이 나타나 든든한 보조가 되고
있다. 지난 1월 결성된 `우록동 프론티어`는 대학생과 대학운생 위주로
10명으 회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할아버지가 수작업으로 해오던 소식지 작업을 도와 한 달에 3백
부를 찍어낸다. 2백50부는 일본 회원들에게, 나머지 50부는 국내로 부
쳐진다.
회원 권기록(27.경북대 경영학과 대학원)씨는 "우록마을은 한-일 과거
사와 현재에서 중요한 공간"이라며 "이곳을 한-일 친선교류의 장소로 만
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념관 세워 친선교류의 장소로 활용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녹동사

일본쪽 생각도 같다.
심포지엄을 주도한 재일교포 신기수씨는 "사야가에 대한 기록보존은 지금
도 히데요시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조선정벌론`에 대응하는 것`이라며
"우록마을에 한국과 일본의 도서자료를 완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봉역사도서실에는 한-일 역사서 등 일본에서 보네오는 책이 한 달에 40~
50권씩 도착해 빈 책장을 채워가고 있다.
사야가의 사적과 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모금운동도 지난 95년부터 일본
에서 펼쳐졌다.
운동은 오사카에서 역사학자 등 2백7명이 발기해 나고야, 구마모토 등지
로 퍼져나갔다.
우록교에서 시작하는 좁은 산길을 따라 15분 가량 올라가면 탁 트인 묘지에
솟은 봉분 3기가 눈에 들어온다.
김충선과 부인 인동 장씨, 유품이 각각 묻혀 있다.
빽빽한 소나무 숲이 싸안듯 둘러친 고즈넉한 공간은 4백년 세얼을 거슬러
올라가 사야가 장군을 만나는 상상을 자극한다.
그의 모습은 그림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사당에도 영정 없이 위패만 모셔 있다.<문집>에 전하는 그의 `행장`에 짧은
대목이 있어 가까스로 짐작할 따름이다.

"공은 신장이 아홉 척이요 힘은 능히 사 오백근을 들었고 수염이 보기 좋게
났고 기백은 무지개같이 뻗쳤고 걸음걸이는 나는 것 같았다."

이런 묘사에서 풍기듯 그는 타고난 무인이었다.
우록마을에 깃든지 3년 만에 만주족의 침입으로 어지러운 북쪽 국경 방
어에 자원하고 나서 10년을 진지에서 지냈다.
광해군은 서울로 돌아온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어필로 `자원하여 계속
변방을 지켰으니 그 마음이 가상하다`(自願仍防 其心可嘉)는 8글자를 써
치하했다.
그 뒤로도 난을 일으킨 이괄의 부장을 밀양에서 잡고(54살), 북방에 침입한 
여진족과 싸웠으며(57살), 병자호란이 나자 남한산성까지 나아가 적과 싸
웠다(66살), 72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6차례의 큰 전투를 치른 것
이다.

4백 여년이  지난 지금, 김충선은 일본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할하고 있
는 것이다.

스크랩 원문 : Lets qo Lib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