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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은(村隱)유희경(劉希慶)과 매창(梅窓)이향금(李香今)이야기

eorks 2024. 5. 23. 08:37

촌은(村隱)유희경(劉希慶)과 매창(梅窓)이향금(李香今)이야기

열세살에 홀로 아비 무덤을 만들던 대문장가 유희경

유희경은 1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린 나이에 홀로 흙을 날라

다 장사지내고 3년간 여 막살이를 했으며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병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30년간이나 모신 효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여막살이 중에 마침 수락산 선영을 오가던 서경덕의 문인 남언경에 눈에 띄어 주

자가례를 배운 뒤  예학 (禮學)에 밝아진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때는 으

레 초빙되었지요.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이 시는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유희경을 그리워

하며 지은 <금가락 지>입니다. 얼마나 애타게 그리웠으면 가락지 낄 손가락이 여

의었을까요? 그렇게 매창이 그리워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허균의 <성수시화>에 보면 “유희경이란 자는 천한 노비이다. 
그러나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

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했다.”라고 소개합니다.

미천한 신분이라 관직없이 시를 지으며 지내다가 부안지방에 이르러 명기 매창

(1573~1610)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하는

한편 호조의 비용을 마련코자 부녀자의 반지를 거둬 충당케 한 공로로 선조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직을 받게 됩니다. 
이후 인목대비로부터 여러 번 술과 안주를 받게 되며 시문학에도 뛰어나 정업원

(淨業院) 하류에 침류대(枕流臺)를 짓고 시를 읊으며 당시에 쟁쟁한 사대부들과 교

류하였지요. 노비 출신이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주자가례에 통달하였으며 나라의

위태로 움에 발 벗고 나선 유희경은 장수하여 80살에 금강산 을 유람하고 9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보기 드문 천민 출신 선비요 학자였습니다.

매창(梅窓, 1573~1610)은 조선 중기 전북 부안의 기생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

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 또는 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아전 이탕종(李湯從)이다.

매창(梅窓)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시기(詩妓)라고 불렸다.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주고받은 연시

(戀詩)는 오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590년경 부안에 내려왔다가 매창을 처음 만난 유희경. 
유희경은 그러나 2년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매창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 때 매창의 나이는 방년 21세.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 
그 정은 매창의 시심으로 피어났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 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부안읍내 성황산 서림공원 입구에 있는 매창의 '이화우' 시비 

흔히 ‘이화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조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를 ‘이화우(梨花雨)’라고 표현했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아닐까. 
아마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듯한 한시 한 편이 더 있다.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柳與梅爭春(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

매창이 이러할 진대 그립기는 유희경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한양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매창이 살고 있는부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유희경의 '매창을 생각하며' 시비

매창이 ‘이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란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계절은 봄이었는데,  그 새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바뀌

었다. 

두 사람은 두 계절 동안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다. 
그럭저럭 세월은 다시 수 년이 흘렀다. 
유희경은 유희경대로, 매창은 매창대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게 되었다. 
이런 경우 씻기 어려운 정한(情恨)을 안게 되는 쪽은 대개 여성이다. 
특히 당시 매창은 ‘노류장화(路柳墻花)’랄 수 있는 기생 신분이었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 상한 매창이 남긴 단장시 한 편을 소개하면,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須試金環減舊圍(수시금환감구위)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어요.

한양(서울)과 부안.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이젠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이 거리를 놓고 마치 서로가 지구 반대편에라도 있는 듯하다.
핸폰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두 사람의 사랑얘기는 마치 수 천년 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로 들린다. 
문명의 발달로 편리는 해졌지만, 깊은 情, 가슴에 품은 恨은 이제 그 어디서 만날 

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