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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흘구곡] 한강 정구 선생 학문적 성찰 이룬 물굽이

eorks 2024. 5. 28. 16:54

[무흘구곡] 한강 정구 선생 학문적 성찰 이룬 물굽이

무흘구곡의 제6곡인 옥류동 정자. 너럭바위와 조화를 이룬 정자 풍광이 아름답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은 경북 성주 가야산 북쪽을 흐르는 대가천에 조성된 구곡이다.

수도산에서 발원해 가야산 북쪽을 빙 둘러 안고 흐르는 대가천에 무흘구곡을 처음

설정하고 경영한 이는 성주 출신으로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어받은

대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수도지맥’의 수도산에서 시작해 가야산을 휘감고 흘러온

대가천(大加川) 맑은 물줄기는 경북 성주 군 수륜면에 이르러 양쪽에 너른 들판을

빚고 시내의 폭을 넓히면서 잔잔히 흐른다. 그 물길은 양정교 근처에 이르러 바위 

언덕을 만나 잠시 멈추는데, 여기가 바로 무흘구곡의 제1곡인 봉비암(鳳飛岩)이다.


무흘구곡의 제1곡 봉비암 위에 조성된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를 모신 서원이다.

봉황 날갯짓 하는 바위 위의 회연서원

‘봉황이 비상하는 모습’인 봉비암 위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 경상북도 유형문

화재 제51호)은 한강 정구를 모신 서원이다. 한강은 41세 때 이곳에 회연초당(檜淵

草堂)을 짓고 침실을 불괴침(不愧寢), 창문을 매창(梅窓), 헌(軒)을 옥설헌(玉雪軒)이

라 했다. 또 100그루의 매화와 대나무를 정원에 심고는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회연서원으로 들어서면 나그네를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서원 입구와 뜰 앞에 가득

한 매화나무들이다. 수백 그루의 매화나무들이 서원 둘레에 있는데, 한강이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00그루의 매화나무는 세월이 흐르며 거의 고사했고, 지금은 세 

그루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제2곡인 한강대(寒岡臺)는 회연서원에서 대가천 물길을 따라 약 1.5km 거슬러 오른

물가에 솟은 20~30m 높이의 암벽이다.
강둑에서 바위로 접근하려면 강변의 무성한 갈대숲을 헤치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따라서 한강대 암봉 정상에 직접 오르려면 회연서원에서 북쪽으로1km 떨어

져 있는 청주 정씨 집성촌인 수성리 갓말에서 뒷길로 5~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한강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청주 정씨 집성촌인 갓말에는 한강의 종손이 살고 있는

한강종택(寒岡宗宅, 문화재자료 제614호)이 남아 있다.

한강대 정상 바위에는 ‘한강대(寒岡臺)’라 새겨진 석각이 눈길을 끈다. 힘찬 필체를

감상하고 강 쪽으로 몇 발자국 더 내려가면 평평한 바위에 한강이 지은 우음(偶吟)

이란 절구 한 수가 보인다.

“솔숲 사이 집에서 잠자리 들고(夜宿松間屋) / 물가의 누각에서 새벽잠 깨네(晨興水

上軒) / 앞뒤에 우렁차다 솔과 물소리(濤聲前後壯) / 이따금 고요 속에 들려오누나

(時向靜中聞)”

시를 읊은 다음, 바위 정상에서 대가천 냇물을 내려다보면 굽이도는 물줄기 너머로

성주의 아름다운 산천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제3곡 무학정(舞鶴亭)은 한강대에서 대가천을 따라 12.5km를 거슬러 올라야 한다.

성주호를 왼쪽에 끼고 달리다 보면 잔잔한 호수가 끝나고 다시 강줄기가 이어지는

물가에 솟은 바위가 눈에 띈다. 선암(船巖), 주암(舟巖)이라고도 하는 ‘배바위’인데,

바위 꼭대기에 앉은 정자가 주변의 자연 풍광과 잘 어울린다.

무학정에서 대여섯 물굽이를 돌면서 4km 정도 오르면 냇가 건너에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선바위’라 불리는 제4곡 입암(立巖)이다. 한강 정구는

이 굽이를 최치원의 흔적이 남은 가야산 홍류동보다 빼어나다고 자부했다. 한강이 

당시 보고 느꼈던 그 풍광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해, 이곳을 지나는 

여행객들은 반드시 이곳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고 간다.


1 한강대 정상 바위에 새겨진 석각. 강인한 느낌이 드는 필체다. 2 무흘구곡의 제1곡

인 봉비암 원경. 3 무흘구곡의 마지막 굽이인 제9곡 용추(龍湫). 바위 협곡을 울리는

우렁찬 폭포수 소리에 정신이 잠시 아득해진다.

입암을 뒤로하고 계속 대가천을 거슬러 오른다. 냇가의 아름다운 풍경에 눈길을 빼

앗기며 30번국도를 따라 3.8km 달리면 성주군의 가천면과 김천시의 증산면의 경계

에 걸린 은적1교에 이른다. 다리 주변에는 깎아지른 기암괴석이 펼쳐지고 맑은 옥류

는 그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간다. 
제5곡 사인암(捨印巖)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흘구곡의 사인암은 은적1교 상류 10m 지점 왼쪽의 암벽이라

고 알려져 왔으나, 이보다 상류 250m 지점의 오른쪽 바위가 진짜 사인암임이 최근

밝혀졌다. 1990년대 초반국도 확포장 공사 과정에서 사인암의 바위가 훼손됐고,

‘사인암(捨印巖)’이라고 새겨진 석각마저 분실되면서 은적1교 바로 상류에 솟은 바

위가 사인암으로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사인암을 뒤로하면 김천시 증산고을이다. 수도산에서 북류한 수도계곡은 증산고을

을 적시며 옥동천이라는 이름으로 백천교 부근에 이르러 대가천 본류에 합류 하는

데, 이 굽이가 바로 제6곡 옥류동(玉流洞)이다. 바윗덩이와 어우러진 계류는 맑고

옥빛 소(沼)도 곳곳에 펼쳐져 있는데, 너럭바위와 조화를 이룬 정자 풍광이 아름답

다.

옥류동을 벗어나면 길은 수도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이 길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는 수도암(修道庵) 가는 길이다. 해발 960m에 터를 잡은 수도암은 도선국사가 발견

하고 7일 동안 춤을 췄을 정도로 터가 좋아 참선 수도장으로 유명한 암자다.

수도계곡은 해발고도가 높고 아름다운 풍치에 계류도 맑아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경사가 약간 급해질 무렵, 갈림길에서 길가 오른쪽에 있는

‘만월당 굿당’이라 적힌 팻말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로 70~80m 정도 개울을 향해 

내려가면 냇가에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보인다. 아름드리 소나무 몇 그루 바위 위

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풍경이 제법 괜찮다. 그 옆에는 ‘무흘구곡 7곡 만월담’이라

적힌 안내 팻말이 세워져 있는데, 최근 밝혀진 진짜 제7곡 만월담(滿月潭)은 이 굽

이에서 상류로 450m 올라간 지점이다.

최근 새로 밝혀진 진짜 만월담은 큼직한 너럭바위가 집채만 한 바윗덩이부터 호박

돌에 주먹돌까지 다양한 크기의 바윗돌들이 흩어져 있는 곳이다. 길 쪽으로 평평한

터를 조성하느라 축대를 쌓으면서 경관이 많이 훼손되긴 했어도 물굽이만 본다면 

옛 흔적이 그런대로 남아 있는 편이다.

만월담에서 150m 정도 오르면 무흘정사가 있던 너른 터에 닿는다. 한강 정구가 학

문을 닦고 연구한 무흘정사(武屹精舍)가 있던 ‘한강 무흘강도지(寒岡 武屹講道址)’

다. 한강은 62세 때 무흘구곡 중 만월담과 와룡암 사이의 평평한 곳에 무흘정사를 

짓고 저술 활동에 몰두하는 한편, 제자를 길러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 

한강이 노래한 절구 한 수가 귀에 쟁쟁하다.

“산봉우리 지는 달 시냇물에 어리는데 / 나 홀로 앉았을 제 밤기운 싸늘하구나 / 여

보게 벗님네들 찾아올 생각 마소 / 구름 짙고 쌓인 눈에 오솔길 묻혔거니”

‘무흘강도지’를 뒤로하고 상류로 오르면 계곡의 풍치는 점점 좋아진다. 계곡 바닥은

온통 새하얀 너럭바위의 연속이며, 개울 건 너에는 병풍 같은 암벽이 높게 솟아 있

다. 그러다 문득 밝은 기운이 두루 퍼지면서 여러 개의 와폭이 연이어 반긴다. 제8곡

와룡암(臥龍巖)이다. 수도산에서 북류하는 수도계곡 맑디맑은 계류는 이 굽이에서

완만하게 누운 바위 위로 흘러내린다. 길 쪽에 붙은 너른반석에 ‘와룡암(臥龍巖)’이

라 쓴 글씨는 용의 모습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무흘구곡의 제4곡인 입암. 맑은 냇물은 입암 아랫도리를 적시고 부드럽게 굽이돌

면서 흘러간다.

우렁찬 폭포소리는 승천하는 용의 울부짖음인가

와룡암에서 2km 정도 시원한 물줄기를 따르면 문득 계곡을 울리는 우렁찬 물소리

에 저절로 눈길이 길 아래 협곡 쪽으로 끌린다. 거기에 용추폭포가 숨어 있다. 수도

산에서 발원해 흐르던 계류는 이 지점에 이르러 문득 17m의 낭떠러지를 만나 뚝 

떨어지는데, 폭포수가 바위에 부딪치며 안개와 무지개를 만들어 환상적인 분위기

를 연출한다. 이 폭포수는 수량 많은 수도산의 모든 물을 끌어 모아 발원한 물길이

처음으로 빚어낸 수도산의 명품이다.

무흘구곡의 마지막 굽이인 제9곡 용추(龍湫)는 도학의 절정이다. 그런데 한강 정구

는 마지막 굽이에서 폭포를 노래하는게 아니고, ‘샘물의 근원’을 노래한다. ‘학자의

정신이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리라. 한강은 이 용추에

서 도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학문적 성찰을 이루고, 무흘구곡의 여정을 마무리

짓는다.

“아홉 굽이라 고개를 돌리고서 한탄한다 / 이내 마음 산천을 좋아한 게 아니거니 /

샘물 근원 이곳에 형언 못 할 묘리 있어 / 여기 이걸 놓아 두고 다른 세계 찾을쏘냐”

 

여행 길잡이
무흘구곡의 아홉 굽이는 제1곡 봉비암(鳳飛岩), 제2곡 한강대(寒岡臺), 제3곡 무학

정(舞鶴亭), 제4곡 입암(立巖), 제5곡 사인암(捨印巖), 제6곡 옥류동(玉流洞), 제7곡

만월담(滿月潭), 제8곡 와룡암(臥龍巖), 제9곡 용추(龍湫)다. 경북 성주군의 수륜·금

수면부터 김천시의 증산면까지 총 35.7km에 걸쳐 있다. 제1곡부터 제6곡까지는 차

량을 이용하는 게 좋고, 제7곡 만월담부터 제9곡 용추까지는 걷는 것도 괜찮다. 더

위를 식히기에 좋은 곳은 제4곡 입암, 제8곡 와룡암, 제9곡 용추 주변이다.

교통(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성주IC → 33번국도 → 대가면 → 양정삼거리(좌회전) → 회연

서원(봉비암)


[무흘구곡] 한강 정구 선생 학문적 성찰 이룬 물굽이

[정의] 
조선 시대 정구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에서부터 김천시 증산면에 이르는 계곡

의 뛰어난 경관에 감흥하여 지은 시. 

[개설] 
「무흘구곡(武屹九曲)」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의 성주댐 아래쪽의 대가천에 자리한 제1곡 봉비암

(鳳飛巖)에서부터 성주댐을 거쳐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의 수도암 아래쪽 계곡에 자

리한 제9곡 용소폭포까지 약 35㎞ 구간의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읊은 시

이다. 성주군에 1~5곡이 있고, 김천시 증산면에 6~9곡이 있다. 정구가 대가천 계곡

의 아름다움에 반해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인 주희(朱憙)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을 본받아 대가천을 오르내리며 경관이 뛰어난 곳을 골라 이름 짓고 7언 절구의 

를 지어 그 절경을 노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흘구곡의 아홉 굽이는 
제1곡이 봉비암(鳳飛巖),  
제2곡이 한강대(寒岡臺), 
제3곡이 무학정(舞鶴亭), 
제4곡이 입암(立巖), 
제5곡이 사인암(捨印巖), 
제6곡이 옥류동(玉流洞), 
제7곡이 만월담(萬月潭), 
제8곡이 와룡암(臥龍巖), 
제9곡이 용추(龍湫)이다. 

[구성] 
무흘구곡은 성주댐 아래쪽 수륜면의 봉비암, 한강대와 성주댐 상류의 무학정[배바

위], 입암[선바위], 사인암 등과 김천시 증산면의 옥류동, 만월담, 와룡암, 용소폭포

의 실제 경관을 배경으로 각각의 절경을 칠언 절구의 한시로 표현하여 총 9수로 구

성되어 있다. 

구곡의 경관을 노래한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 


「제1곡 봉비암」 
첫째 굽이라 여울가 낚시 배가 두둥실/ 석양빛 강물 위에 낚시줄이 얼기설기/ 자질

구레 인간 잡념 까마득히 잊고서/ 내 안개 속에 노질함을 그 누가 안단 말고
[一曲灘頭泛釣船 風絲繚繞夕陽川 誰知捐盡人間念 唯執檀槳拂晩煙]. 


「제2곡 한강대」 
둘째 굽이라 미녀가 봉우리로 화하여/ 봄꽃으로 가을 단풍 단장을 고이 하니/ 저 옛

날 초나라의 굴원이 알았다면/ 한 편의 이 소경을 또 지어 보탰으리
[二曲佳妹化作峰 春花秋葉靚粧容 當年若使靈均識 添却離騷說一重]. 


「제3곡 무학정」 
삼곡이라 이 골짝 누가 배를 감췄던가/ 천년토록 야밤에 지고 간 이 없었거니/ 건너

야 할 큰  강이 그 아니 많을 까만/ 건너갈 방도 없이 가련할 뿐이어라
[三曲誰藏此壑船 夜無人負已千年 大川病涉知何限 用濟無由只自憐]. 


「제4곡 입암」 
넷째 굽이라 백 척 바위에 구름 걷히니/ 바위 위 화초 보소 바람결에 하늘하늘/ 이

가운데 싱그럽기 이 같음을 뉘 알꼬/ 저 하늘 달그림자 못 속에 떨어졌네
[四曲雲收百尺巖 巖頭花草帶風髮 箇中誰會淸如許 霽月天心影落潭]. 


「제5곡 사인암」 
다섯 굽이라 맑은 못 그 얼마나 깊은고/ 못가의 솔이며 대 절로 숲을 이루었네/ 복건

차림 은자가 높은 당에 앉아서/ 인심이요 도심을 도란도란 얘기하네
[五曲淸潭幾許深 潭邊松竹自成林 幅巾人坐高堂上 講說人心與道心]. 


「제6곡 옥류동」 
여섯 굽이라 초가집 여울 가에 놓였으니/ 어지러운 세상사 가리운게 몇 겹인고/ 여기

살던 은자여 그 어디로 떠나갔나/ 풍월만 남아 있어 만고토록 한가롭네
[六曲茅茨枕短灣 世紛遮隔機重關 高人一去今何處 風月空餘萬古閑]. 


「제7곡 만월담」 
일곱 굽이라 높은 봉 여울물 감아도니/ 이런 풍광 일찍이 구경을 못했어라/ 장난꾸

러기 산신령 조는 학을 깨워볼까/ 솔 이슬 까닭 없이 학 뺨에 떨어지네
[七曲層巒繞石灘 風光又是未曾看 山靈好事驚眠鶴 松露無端落面寒]. 


「제8곡 와룡암」 
여덟 굽이라 오르니 시야 한층 트이는데/ 멀리 갈 듯 흐르는 물 다시금 돌아든다/ 안

개구름 꽃과 새들 저마다 낙을 누려/ 노는 사람 오든 말든 나 몰라라 하누나
[八曲披襟眼益開 川流如去復如廻 煙雲花鳥渾成趣 不管遊人來不來]. 


「제9곡 용추」 
아홉 굽이라 고개를 돌리고서 한탄한다/ 이내 마음 산천을 좋아한 게 아니거니/ 샘

물 근원 이곳에 형언 못할 묘리 있어/ 여기 이걸 놓아두고 다른 세계 찾을쏘냐
[九曲回頭更喟然 我心非爲好山川 源頭自有難言妙 捨此何須問別天]. 

[특징]
 정구는 수도산의 계류인 대가천 계곡에 주자의 구곡 경영을 차운하여 자신만의 구

곡을 설정하였다. 주목할 것은 9수의 시를 통해 구곡의 각 굽이에 주제를 부여하고

관념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과정이 단지 아름다운 경관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 도학의 근원을 찾기 위한 일종의 실천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는 점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산수에 은거하여 아담한 정원을 꾸미거나, 산과 바위 혹은 시

내의 물굽이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사상과 연결된 주위의 생활 세계를 창조

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구곡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구곡은 단순한 물의 굽이침의

차원을 넘어서 주자의 도학적 이상을 배우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유행된 바 있

는데, 당시 주자는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절대적인 이상 이었으며 흠모의 대상이었

다. 
특히 주자가 만년에 
은거하며 강학하던 무이산의 절경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철학의

담론을 펼칠 수 있는 정신적인 이상향으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산수를 경영하여 정사를 짓고, 무이 산지를 탐독하며,

구곡을 경영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자연을 완상하는 도학적 이상향의

해법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서실에 ‘구곡도’를 걸어 놓고, ‘구곡시’와 ‘구곡가’를

차운하여 읊는 것은 무이산에 실제 가보지 못한 한탄과 동경의 실천적 방도로써 널

리 유행하였다. 또한 구곡의 경영에 있어서도 유교·불교·도교 등의 종교적 교리나

사상을 반영하여 관념적 실체로 명명(命名)하였는데, 각 곡을 도학적 이상을 실현시

키는 수신의 과정으로 생각하였으며, 얻으면 경세제민(經世濟民)하겠다는 그 당시 

사대부들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으로도 이해되었다. 이처럼 정구의 「무흘구곡」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구곡 경영과 그를 통한 철학적·종교적 사상 및 실천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적(史的)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

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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