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머무는 동안 몇 달이라도 좋으니 자기 집에 있으라면서 詩文(시문)에 능한 기생을 데려다가 명승고적들을 안내케 하고, 불편함이 없도록 그의 시중 을 들게 하였다.
어제까지 토굴 잠을 자면서 끼니를 걱정하던 그는 하루아침에 평양기생의 수 발을 받는 한량이 된 것이다.
20 이 갓 넘어 보이는 竹香(죽향)은 평양의 기생세계에서 20 이 넘으면 老妓 (노기)라면 서 겸손해하지만 詩書歌舞(시서가무)가 모두 능한 재기 넘치는 활 달한 名妓(명기)였다.
김삿갓은 그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練光亭(련광정)을 비롯하여 浮碧樓(부 벽루), 望月樓(망월루), 風月樓(풍월루), 詠歸樓영귀루), 涵碧亭(함벽정), 快哉 亭(쾌재정), 永明寺(영명사), 長慶寺(장경사) 등등, 평양에서 이름난 명소는 하 나도 빼지 않고 모두 돌아보았다.
어느 날 練光亭(련광전)에 올라 술이 거나해진 김삿갓은 죽향에게 “평양기생 은 무엇을 잘 하느냐? (平壤妓生何所能(평양기생하소능))”고 물었더니 죽향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시도 또한 잘 한다. (歌能舞能詩亦能(가능무능시 역능))”고 거 침없이 대답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김삿갓은 눈 딱 감고 “잘한다잘한다 하는데 그중에 특별히 잘하는 것은 무어냐?(能能其中別何能(능능기중별하능))”고 또 물었다.
죽향이 얼굴을 잠시 붉히더니 “달밤 삼경에 사나이 다루는 것을 잘한다. (月夜 三更弄夫能(월하삼경롱부능))”고 대답한다.
김삿갓이 무릎을 치면서 너털웃음을 웃고, 그것은 차차 확인이 될 터이지 만 먼저 시를 한수지어보라고 했다.
죽향은 江村暮景(간촌모경)이라는 제목의 시를 다음과 같이 읊는다.
실버들 천만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 구름인양 눈을 가려 마을을 볼 수 없네.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이 들리는데 부슬비 내리는 강에 날이 저문다. 千絲萬縷柳垂門(천사만루류수문) 綠暗如雲不見村(록암여운불견촌) 忽有牧童吹笛過(홀유목동취적과) 一江烟雨白黃昏(일강연우백황혼) 김삿갓은 두번 세번 감격스럽게 읊어 보면서 누구의 시냐고 물었다.
정자 위에 걸려있는 어느 시보다도 멋진 이 시가 한낮 기생의 자작 시리라고 는 생각조차 못했던 김삿갓이었다.
죽향은 못내 서운한 듯, 묵묵히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가 김삿갓이 재차 누구 의 시냐고 채근하자
"제 비록 기생일망정 남의 시를 표절할 만큼 천박하지는 안사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술이 말끔히 깬 김삿갓은 다시 한 번 시를 읊어 보고
"과연 평양기생이로구나" 생각하면서 죽향에게 정중히 거듭 사과한 후에 어 색한 분위기를 얼버무리기 위하여 똑 같은 門(문), 村(촌), 昏(혼) 석 자의 운 자를 써서 연광정이라는 즉흥시 두 연을 연거푸 읊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엔 높은 문이 서 있고 만경창파 대동강엔 푸른 물결 굽이친다. 지나가는 봄 나그네 말술에 취했는데 천만가닥 실버들 십리 강촌에 늘어졌구나. 截然乎屹立高門(절연호흘립고문) 萬頃蒼波直碧翻(만경창파직벽번) 一斗酒三春過客(일두주삼춘과객) 千絲柳十里江村(천사류십리강촌)
외로운 따오기는 노을 빛 끼고 돌아오고 짝지은 갈매기 눈발처럼 휘 나른다. 물결 위에 정자 있고 정자 위에 내가 있어 초저녁에 앉았는데 밤이 깊자 달이 뜨네. 孤丹鷺帶來霞色(고단로대래하색) 雙白鷗飛去雪痕(쌍백구비거설흔) 波上之亭亭上我(파상지정정상아) 坐初更夜月黃昏(좌초경야월황혼)
연광정 위에서 저물어 가는 대동강 풍경을 바라보며 죽향의 시에 화답한 시였 다.
김삿갓의 시를 몇 번이고 거듭 읊어 본 죽향은 어느새 시에 취한 듯 그늘졌 던 낯빛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