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를 튼 스님 대구·파계사
때는 조선 숙종조 중엽. 배불정책이 극심하여 전국의 절마다
스님들은 부역 아니면 궁중에서 쓰는 종이와 노끈 미투리 등
을 삼느라 혹사당했다.
『원, 이래서야 어디 수도승이라고 할 수 있겠나.』
스님들의 푸념은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대구에서 서북쪽으로 약 50리 거리에 위치한 팔공산(해
발 1192m) 기슭의 천 년 고찰 파계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지 스님, 오늘 삭발하실 날입니다.』
『안 깎는다.』
파계사 주지 현응 스님은 시자가 준비해 온 삭도를 쳐다보지 않
은 채 한마디로 물리고 말았다.
시자는 자못 궁금했다.
『스님, 어디 편찮으신지요?』
『아니다.』
『그럼 왜….』
『그럴 일이 있느니라.』
정갈하기로 소문난 현응 스님이 한 철이 지나도록 삭발을 하지
않자 절안의 대중들은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던 스님은 어느 날 짧게 기른 머리로 솔잎상투를
틀었다. 또 승복을 속복으로 갈아입고는 길 떠날 채비를 했다.
놀란 시자가 달려와 물었다.
『스님! 웬일이십니까? 이 길로 환속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예끼 이녀석.』
『스님, 그럼 머리는 왜 길렀으며, 옷은 왜 속복으로 갈아입으
셨는지 속시원히 사연을 들려주십시오.』
『그래 말해주마. 그 동안 미투리 삼고 종이 만드는 일은 참고
견디었으나 젊은 유생들의 행패는 이제 더이상 볼 수가 없구나.
그래서 내 이렇게 변장을 하고 상경하여 조정에 탄원을 할 것이
니라.』
승려의 신분을 속이고 겨우 서울로 들어간 현응 스님은 어느 밥
집의 잔심부름을 하며 탄원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3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스님은 때를 얻지 못했다. 그만 파계사로 발길
을 돌리기로 결심하던 날 밤. 스님은 숭례문(남대문) 근처의 봉
놋방에서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냈다.
그날 밤 숙종 임금은 숭례문 근처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
었다. 참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내관을 시켜 숭례문 근
처를 살피게 했다.
어명을 받아 아침 일찍 숭례문 근처로 나아가 인근을 살피던 내
관은 행장을 꾸려 막 길을 떠나려는 현응 스님과 마주쳤다. 비록
행색은 남루하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인품이 달라 보여 내관
은 현응 스님을 은밀히 어전으로 안내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고?』
『용파(당시 현응스님의 법명은 용파였다. 현응은 뒷날 숙종이
내린 시호)라 하옵니다.』
『무슨 용자를 쓰느냐?』
『용 용 자입니다.』
숙종은 범상치 않은 인품에다 용(龍)자 이름을 지닌 현응 스님
의 신상을 상세히 물었다.
현응 스님 역시 절호의 기회다 싶어 자신의 신분과 사찰 실정
을 밝히면서 불교 탄압을 탄원했다.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렇게 불교를 탄압하게 되면 나
라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숙종은 현응 스님의 간곡하면서도 강력한 청에 마음이 움직였
다.
『내 그대의 청을 들어줄 테니 그 대신 태자를 얻게 해줄 것을
부탁하오.』
현응 스님은 그 길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삼각산 금성암의 농상
스님과 함께 세자 잉태를 기원하는 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현응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상 스님은 삼각산에서 기도하였으
나 태자 잉태의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기도를 회향한 두 스님은
똑같이 숙종의 사주에 세자가 있지 않음을 말했다. 그때였다.
『여보게, 자네가 세자로 태어나게.』
현응 스님은 농상 스님에게 진지하게 권했다.
농상 스님은 어느 날 밤 숙빈 최씨에게 현몽한 뒤 태자로 환생
했으니 그가 바로 1724년부터 52년간 재위하여 학문과 예술의
전성시대를 이룬 영조대왕이다.
태자를 얻은 숙종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임금은 용파
스님에게 현응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사의 큰 은혜 내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소. 이제부터 파계사
를 중심으로 40리에 걸쳐 나라에서 거두던 세금을 모두 절에서
거둬들이도록 하오.』
숙종은 성은을 베풀었으나 현응 스님은 이를 거절다.
『소승 나라를 위해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세금을 절에서 거
두어 정재로 쓰기에는 적합치 않은 듯하오니, 대신 경내에 선
대 임금님의 위패를 모시도록 윤허하여 주옵소서.』
임금은 쾌히 윤허했다. 현응 스님은 즉시 파계사로 내려가 기영
각을 세우고 선대 왕의 위패를 모시니 지방 유생과 양반의 행패
는 자연 끊어지게 되었다.
현재 사적비 부근에 있는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
는 그때 새겨진 바다.
현응 스님이 건립하고 그곳에서 수도했다는 성전암 가는 길목엔
현응 스님의 부도가 서 있다. 또 성전암에는 현응대사의 영정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지금쯤 현응 스님은 몇번째 환생하여 어
느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실는지.
전생에 농상 스님이었던 영조대왕이 11세에 썼다는 「현응전」
이란 편액이 지금까지 성전암 법당에 걸려 있어 인과와 업 그리
고 윤회의 질서를 보게 한다.
또 이를 입증이나 하는 듯 지난 1979년에는 법당 관세음불상을
개금하던 중 복장되어 있던 영조대왕 어의가 나와 교계와 학계
의 관심을 끌었다. 숙종의 하사품 중 병풍 2점과 구슬 2개가 남
아 있다.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에 의해 창건된 파계사는 조선
선조 38년(1605) 계관 스님이 중창했고 이어 현응대사가 숙종
21년(1695) 삼창했다. 파계사란 이름은 절 좌우 계곡에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흩어지지 못하게 잡아 모은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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