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전설

이성계의 꿈

eorks 2012. 7. 12. 05:36
불교전설
이성계의 꿈
    안변·釋王寺
    
    조선국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아직 장군 시절일 때다. 날로 부
    패해 가는 고려왕조를 탄식하던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 팔도
    강산을 두루 돌며 무예를 익히는가 하면 명산대찰을 찾아 제불
    보살님의 가호를 빌었다.
    그가 함경도 안변 땅에 머물던 어느 날 밤. 이성계는 참으로 
    묘한 꿈을 몇 가지나 꾸었다.
    『거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꿈을 
    하룻밤에 몇 가지나 꾸다니….』
    이튿날 새벽 눈을 뜬 이성계는 간밤 꿈자리가 어쩐지 석연치 
    않아 하나하나 꿈을 되새기며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다.
    풀리지 않는 꿈 때문에 답답해 하던 그는 대장부 체통도 접어
    둔 채 그 마을에서 해몽을 잘한다는 노파를 찾아갔다.
    『내 간밤에 하도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이렇게 찾아왔으니 
    해몽을 좀 부탁하오.』
    상세히 설명하는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들은 점쟁이 
    노파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대장부가 받은 꿈의 계시를 어찌 미천한 아낙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40리쯤 들어가면 설봉산이 있
    고 그 산허리 조그만 토굴에 신승이 한 분 살고 계십니다. 그 도
    인 스님은 토굴을 파고 공부하신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한 
    번도 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합니다. 그 스님께 가면 잘 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성계는 그 길로 설봉산 도인 스님을 찾아갔다. 토굴에 당도
    하니 스님은 서정에 들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스님께 삼배를 올린 이성계는 찾아온 사연을 
    밝혔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구요? 거 어디 들어봅시다.』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온 고을 닭들이 일제히 울어대더
    니 집집마다에서 방아찧는 소리가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늘
    에서 꽃이 마치 비오듯 떨어져 내렸습니다. 다시 또 꿈은 이어
    져 저는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
    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문득 꿈을 깨게 됐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참으로 그런 꿈을 꾸었다면 함부로 발설해선 안될 꿈입니다.』
    스님은 은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그 꿈은 아주 길몽입니다. 마을의 닭들
    이 일제히 울어댄 것은 「꼬끼오 꼬끼오」 한 것이니 이는 반드
    시 고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며〔高貴位〕방아찧는 소리는 
    귀하게 될 것을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또 헌 곳간에서 서까래 
    세 개를 가로졌으니 그 모양은 마치 임금「왕」자와 같지 않습
    니까.』
    스님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흥분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상기된 얼굴에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님, 그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스님은 말없이 시 한 수를 적어 내놓았다.
    花落能成寶 鏡破豈無聲
    꽃이 떨어졌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졌으니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스님은 다시 이성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대 얼굴엔 군왕의 기상이 가득하오. 허나 아직 겁기(劫氣)
    가 다 벗어지지 못했소. 성현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일이 성취될 것이오. 앞으로 3년은 더 기다려야 할 터이니 그 
    동안 이곳에 절을 세우고 오백 나한을 모셔 기도를 잘 올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일은 나만 알고 비밀을 지킬 터이니, 장군도 
    꿈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오.』
    스님께 스승의 예를 올리고 물러난 이성계는 기도 올리는 간절
    한 마음으로 안변 땅에 절을 세우고는 후일 임금 왕 자를 해석
    했다 하여 「석왕사」라 불렀다.
    그 후 이성계는 오백 나한을 모시기 위해 석왕사 경내에 응진
    전을 건립했다.
    때마침 함경도 길주에 있는 광적사가 병화로 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그 절에 방치된 대장경과 오백 나한상을 
    석왕사로 모셔 오기로 했다.
    길주에서 원산포까지 배로 옮겼으나 원산서 석왕사까지는 이
    성계가 직접 무거운 돌나한님을 한 분씩 들에 업어 정성스럽게 
    모셨다. 이렇게 498상을 옮기고 마지막 두 분이 남게 되자 그
    는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었는지 두 분을 한꺼번에 옮겨 모셨다.
    다음날 아침 기도를 드리고 나서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간밤
    에 분명히 오백 나한님을 다 모셨는데 맨 나중에 모셔온 존상 한
    분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놀란 이성계는 사방을 두루 
    찾았으나 보아지 않자 단념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그 존상이 나타날 줄이야.
    『그대의 신심이 그렇게 여일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한 분씩 
    업어 오시다가 나만 덧붙여 업어가다니. 나는 그렇게 정성이 
    부족한 푸대접을 받기가 싫네. 해서 묘향산 비로암에 와 있으
    니 그리 알게.』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성계는 날이 밝는 죽시 모향산 비로암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곳에 나한상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이었다.
    즉시 달려간 이성계는 정중한 자세로 참회한 후 다시 그 나한
    님을 모셔왔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그 나한님은 또 없어지고 
    말았다.
    이성계는 할 수 없이 그 나한존상의 자리에 명패만을 모셨다. 
    석왕사 응진전에 나한님이 5백 명에서 한 분 모자라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라고 한다.
    『큰일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일러준 스님
    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긴 이성계는 천일간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올려 마침내 역사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조선을 건국
    하고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제일 먼저 신승을 찾아 왕사로 모
    시니 그 스님이 조선조 5백년 기반을 닦는 데 큰 도움을 준 무
    학대사였다.
    이성계는 등극 후 명하여 석왕사를 도에서 으뜸가는 거찰로 
    만들었다.
    건문 신사(태종1·1401)년에는 친히 이곳에 와 동구에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으니, 후일 소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좋
    은 배를 임금에게 올린 것은 그때의 성교였다. 이렇듯 유서깊은 
    절이나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의 사찰」일 뿐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

'불교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두쇠 영감의 최후  (0) 2012.07.13
며느리바위  (0) 2012.07.11
염라대왕의 분부  (0) 2012.07.07
세 처녀의 유혹  (0) 2012.07.06
조신의 꿈  (0) 2012.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