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일본 /이와미 은광과 문화경관
[Iwami Ginzan Silver Mine and its Cultural Landscape]요약 : 이와미(石見) 은광은 일본 열도 혼슈(本州) 섬 남서부의 해발 600m 산지에 있다. 깊은 하곡(河谷)을 따라,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채굴이 이루어진 대규모 은광, 제련소, 정련소, 광산촌 등의 고고학적 유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는 은광석을 해안으로 운송하기 위한 가도(街道)와, 한국과 중국으로 수출이 이루어졌던 3곳의 항구 마을도 있다.
이 광산은 16〜17세기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전반적인 경제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고, 일본에서 금과 은의 대량 생산을 촉진시켰다. 현재 은광 지역은 숲으로 덮여 있다. 이 유적에는 산성, 신사, 해안으로 이어지는 가도(街道)의 일부, 은광석을 선적했던 도모가우라 (鞆ヶ浦), 오키도마리(沖泊), 유노쓰(温泉津) 항구가 포함된다.
류겐지마부
이와미 은광 및 문화 경관 출구
이와미 은광 및 문화 경관 관세음사
이와미 은광 및 문화 경관 관세음사
라칸지 오백나한
라칸지 오백나한이 있는 경사진 암반면
라칸지 오백나한 기념탑
라칸지 오백나한
라칸지 오백나한
라칸지 오백나한
라칸지 오백나한
라칸지 오백나한
라칸지 오백나한
시미즈다니 제련소터
시미즈다니 제련소터
시미즈다니 제련소터
시미즈다니 제련소터
시미즈다니 제련소터
시미즈다니 제련소터 입구
류겐지마부 입구
류겐지마부
류겐지마부
류겐지마부
류겐지마부
류겐지마부
류겐지마부
류겐지마부
류겐지마부 출구
류겐지마부 출구
구 가와시마가 입구
구 가와시마가
구 가와시마가
구 가와시마가
구 가와시마가
구 가와시마가 - 2층 다락방
이와미 오오모리구역
이와미 오오모리구역
이와미 오오모리구역
이와미 오오모리구역
국가 : 일본(Japan)
위치 : 시마네현(島根縣), 오다시(大田市)
좌표 : N35 6 46,E132 26 6
등재연도 : 2007년(2010년 일부 변경)
이와미 은광과 문화경관 :
기록을 보면 은 광맥이 발견된 것은 14세기라는 몇몇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이와미 은광의 광맥은 1526년에 발견되었고, 당시 일본의 가장 큰 무역항이었던 하카다(博多)의 유력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貞)가 은광을 개발했다고 한다. 주테이는 이와미 지역의 봉건 씨족인 오우치(大內) 일가의 보호 아래 사업을 진행했고, 중국, 한국과의 무역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했다. 1533년경에는 보다 효율적인 은 정련기술인 회취법이 조선을 통해 유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광산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530년대 말에 오우치 일가가 한해에 바치는 공물량은 16kg에서 800kg으로 증가했다.
한편 인근 지역의 지주들도 수익성이 큰 광산을 얻기 위해 서로 싸워 왔으며, 그들은 1530년대와 1540년대에 이와미 은광의 지배권을 빼앗기 위해 오우치 가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광산 주변에 있는 3곳의 산성은 이때에 건설되었다. 1550년대에는 아마고(尼子) 일가가 10년 동안 은광을 지배했으며, 1561년에는 지배권이 모리(毛利) 일가로 넘어갔다. 모리 일가는 인근 지역에 속국을 세웠으며, 새롭게 개발된 유노츠, 오키도마리 항구로 가는 새 길을 만들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1600년 권좌에 오른 그는 에도 막부를 세웠고, 일본 전역의 금광과 은광을 몰수했다. 이와미 은광에는 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가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갱도를 개발했고 은 생산을 늘렸다. 광산 사업은‘야마시(山師)’라 불리는 광산 경영인이 맡았으며, 대신에 에도 막부에 은을 수수료로 바쳤다. 야마시였던 야스하라 덴베(安原傳兵衛)는 1600〜1602년에 에도 막부의 지원 아래 가마야마부(窯屋間歩)와 다른 광산을 경영했고, 매년 13,500 kg의 은을 공물로 바쳤다. 채굴은 광부들이 담당했으며, 야마시는 계약을 통해 광부를 고용했다. 그들이 도제였는지 혹은 자율적 노동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와미 은광은 17세기 초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수만 명이 이곳에서 일을 했다. 네덜란드 및 영국과 무역이 확대되고,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안정기가 지속되면서 이와미 지역은 더욱 발전했으며, 은 수요는 더욱 증가했다. 은 생산은 야마시의 개인 자본으로 운영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중앙정부인 에도 막부에서 파견한 행정관이 은광 및 주변 주역을 관리했고, 덕분에 생산량은 더욱 늘어났다. 임명장 문서에는 은 생산과 관련 있는 소수의 특정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은광이 더 넓은 지역의 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 명확하게 제공해 주는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미 광산의 은 생산은 1620〜1640년대를 정점으로 하여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갱도를 땅속으로 더 깊이 파야 했으며, 이로 인해 작업은 어려워지고 물을 퍼내기 위한 비용은 늘어났다. 은 생산의 수익성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1691년 총 92개의 갱도 중 63개가 폐쇄되었다. 1729년에는 129개의 갱도 중 74개가 폐쇄되었다. 1823년에는 279개의 갱도 중 247개에서 작업이 중단되었다. 생산량은 17세기 말에는 매년 1,000〜2,000kg에 달했지만, 19세기 중반에는 100kg으로 감소했다.
1868년 에도 막부가 몰락한 후 새로 들어선 정부는 1869년 이와미 은광을 민영화했다. 1887년 후지타구미(藤田組)라 불리는 민간 회사가 은광 운영을 담당했고, 오모리 은산(大森銀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5년 시미즈다니(清水谷)에 정련소를 건설하고 서양 기술을 도입했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폐쇄되었다. 또 다른 정련소가 요가이산(要害山) 서쪽 기슭의 고지다니(柑子谷)에 건설되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구리를 중심으로 했지만, 금과 은의 제련과 정련 작업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구리 가격이 하락하고, 값싼 구리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1923년에 광산은 폐쇄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금속 수요가 늘어나자 1942년 광산을 다시 열려고 시도했다. 그렇지만, 1943년 태풍 피해를 입으면서 이마저 실패로 끝났다.
정치적 맥락과 관련 있는 광산의 자세한 역사는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서 빠르게 발전한 광산으로의 기술 이전에 관한 자세한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른 지역으로 회취법이 보급된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만, 채광 및 제련 기술의 영향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회취법이 일본에 전래된 경위에 대한 증거, 일본의 다른 지역으로의 보급, 일본에서 사용된 기술의 기원, 그리고 고대 이래 서양에서 사용된 회취법 기술과의 관계에 대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직까지 극히 적은 수의 광산만이 발굴되기는 했지만, 기술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알려주는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외부 세계와 모든 교류를 금지했던 쇄국 시대에 일본 내에서 광산 기술이 발전한 경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또한 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일본인 스스로 개척한 것인지의 여부도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더불어 일본에서 새로 채굴된 은의 주요 공급자인 이와미 은광의 역할과 그것이 일본 및 인접 국가의 경제에 미친 영향도 자세히 알기도 힘들다. 남미의 은 생산이 감소하면서 17세기 일본의 은 수출이 증가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는 듯 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기도 쉽지는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와미 은광과 문화경관 [Iwami Ginzan Silver Mine and its Cultural Landscape]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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