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스위스 /라보의 포도원 테라스
[Lavaux, Vineyard Terraces]
요약 : 라보의 포도원 테라스(Lavaux Vineyard Terraces)는 시옹 성(Chateau de Chillon)에서 보(Vaud) 주 로잔(Lausanne) 시 동쪽 외곽까지 제네바 호수의 북쪽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30㎞에 걸쳐 이어진다. 이곳은 마을과 호수 사이에 있는 완만한 산비탈에 펼쳐진다. 로마 시대에도 이 지역에서 포도가 재배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으나 현재의 포도원은 11세기 베네딕트회와 시토회 수도원이 이 지역을 관장했을 때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인간과 자연 환경 간의 수세기에 걸친 상호 작용을 보여 주는 뛰어난 예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지역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이 지역 경제에 항상 중요했던 상품인 고품질의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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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 포도 재배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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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 포도 재배지역
국가 : 스위스(Switzerland)
좌표 : N46 29 31,E6 44 46
등재연도 : 2007년
라보의 포도원 테라스 :
이곳의 많은 로마 유적과 함께 발굴된 고대 유물에서 포도주 숭배에 관한 라틴어 글귀가 발견되었다. 이는 로마 시대에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 이 지역을 경작했음을 암시한다. 생사포랭(Saint-Saphorin) 마을은 로마의 도로를 따라 지어진 로마 저택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로잔은 로마의 촌락이었다. 로잔 시는 로마 주둔지에서 성장한 도시이며 1803년에 스위스 연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보이(Savoy)의 공작, 로잔의 주교, 그리고 나중에는 베른(Bern)의 지배를 받았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보면 9세기부터 포도 경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 보 주에 해당하는 여러 지역이 언급되고 있다. 12세기경에 여러 개의 큰 수도원이 로잔의 주교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곳에는 오트리브(Hauterive)의 시토 수도원(1138), 호트크레트(Hautcrêt) 수도원(1141), 몬테론(Montheron) 수도원(1142)이 있다. 이후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400여 년 동안 이 비옥한 땅을 관리하고 경관을 만든 것은 수도원이었다. 그들은 계단식 밭을 일구고 포도주를 수출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현재의 경계와 도로들은 이 중세 구조를 따른 것이다.
14세기에 사업이 성장하고 확대되자 수도원의 수도사와 수사들은 토지의 대부분을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포도 재배를 하면서 곡식을 재배하고 목축과 과수원 일도 하는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농작물의 일부(수확 과일의 ½, ⅓, 또는 ⅖)를 수도원에 지급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많은 농가들이 자리를 잡았다. 예를 들어 샤퓌(Chappuis) 가문의 포도 재배 기록은 13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31년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포도나무를 위해 설치한 구조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계단식 밭의 넓이는 10m~15m이고 높이 5m~6m 되는 담으로 지지했다고 한다. 포도 재배 농장주들에게 담의 관리를 맡기고, 물이 흐르도록 하는 슬라이드를 관리하게 하는 계약 조항은 1391년에 생겨났다. 1536년에 로잔은 베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몇몇 부유한 베른 출신의 귀족 가문이 라보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베른에서는 브베(Vevey)에서 무동(Moudon)까지 도로를 개량했다.
포도의 질을 높이기 위해 포도 재배를 세심하게 관리했다. 처음에는 로잔의 주교가 관리를 맡았으며 나중에는 베른 사람들이 관리했다. 관리에 대한 첫 증거는 13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도주 저장실을 정하고, 지역의 포도주를 권장했으며, ‘외국’의 포도주와 증류액(포도의 거름을 빼앗고 너무 많은 목재를 필요로 한다)을 금지했다. 포도를 재배하는 토지가 곡식을 경작하는 밭보다 가치가 훨씬 높아 로잔의 중산층은 많은 수익을 거두게 되었고, 이에 따라 포도 재배 면적을 넓히라는 압력이 생겼다. 이에 대응하여 그런 상황을 막고 포도의 질을 유지하려는 입법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BR>
1800년경에는 부유한 세속 가문과 기독교 가문의 대표들 외에도 작은 땅을 가진 토지 주인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에는 종교개혁 후에 토지를 계속 보유하고 있던 프라이부르크(Freiburg)와 관계있는 오데리브(Hauterive)와 같은 몇몇 수도원이 포함된다. 이렇게 땅을 잘게 분할하여 소유했다는 것은 토지의 이용 효율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잔이 새로 형성된 스위스의 주인 보 주의 주도가 되고 스위스 연방에 가입한 1803년 이후에는 농업을 개선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테라스를 개선하고, 침식을 막기 위해 더 큰 담을 만들었으며, 전체 구역에 새로운 배수로를 냈다.
1849년 보 의회는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로잔에서 베브를 잇는 도로를 개량하고 확장하는 일을 승인했다. 19세기 말에는 호수를 따라 난 절벽에 생긴 도로가 컬리(Cully)와 세브르(Chexbres) 사이의 마을들을 연결해 주었다. 1861년에는 마침내 철도가 놓였다. 철도는 1862년과 1904년에 확장되어 현재 철도 노선은 이 지역을 삼각형으로 감싸고 있다.
포도 재배에 가장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북아메리카에서 필록세라(phylloxera)라고 하는 포도나무뿌리진디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병은 1886년 라보에 상륙했다. 그래서 포도 재배 농장주들은 재배 방식을 바꾸었다. 병의 재발을 막는 화학적 처리를 하기 위해 포도밭에 들어가기 쉽게 만들었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옛날 방식들 중 많은 것이 사라졌다. 새로 접붙인 포도를 심을 때는 ‘고블릿(goblet)’ 방식보다는 줄을 지어 심었다.
주 차원(canton level)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위기에 맞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주 및 연방 차원에서 당국이 개입했다. 포도주의 질을 유지하고 포도 재배 농장주의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포도주 법안을 제출했고 산업을 더욱 엄격히 규제했다. 이리하여 포도 재배자들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제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로잔을 비롯한 많은 마을들이 커지며 포도 재배자들은 자신들의 작은 땅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교통이 발달하여 도시에 살며 농사를 짓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국 혼합농업이 사라지며 소와 돼지 농장은 없어졌다. 1957에서 1977년 사이에 스위스 문화의 일부로 유지하기 위한 법안이 제출되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포도주 생산뿐 아니라 포도밭 경관 보호와 관련해서도 포도주 산업의 구세주와 같이 여겨진다. 포도밭 경관에 마지막으로 있었던 큰 변화는 이 지역의 북쪽 가장자리에 A9 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이었다. 이곳은 완충지역으로 제안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보의 포도원 테라스 [Lavaux, Vineyard Terraces]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https://t1.daumcdn.net/cfile/cafe/171F28234C07CF6F01)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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