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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스페인 /헤라클레스의 탑(604)

eorks 2021. 2. 6. 08:06

세계문화유산 /스페인 /헤라클레스의 탑
[Tower of Hercules]
요약 : 헤라클레스의 탑은 스페인 북서부 지역에 있는 라 코루냐(La Coruña) 항구 입구에서 등대와 주요 지형지물의 역할을 해왔다. 1세기 후반에 로마인들이 파룸 브리간티움(Farum Brigantium)을 건설한 뒤에 설치한 헤라클레스의 탑은 높이 57m의 암석 위에 서 있으며, 탑 자체의 높이는 55m이다. 그중 34m는 로마 시대에 석조 공사가 완성된 것으로, 나머지 21m는 18세기의 건축가 유스타키오 지아니니(Eustaquio Giannini)가 복원했으며, 2개의 팔각형 모양을 덧붙여 로마 시대의 핵심 부분을 더 증가시켰다.
탑의 기단과 직접 맞닿은 부분에는 작은 직사각형의 로마 시대 구조물이 있다. 이 유적지는 또한 조각공원이기도 하다. 철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몬테 도스 비코스(Monte dos Bicos) 바위 조각과 이슬람교도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1990년대에 발굴한 결과 로마 시대에 놓인 건물의 기반이 드러났다. 유일한 고대 그리스 · 로마 양식의 등대이고, 구조적 완전성과 기능적인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중세 시대부터 19세기까지 헤라클레스의 탑에 대한 전설이 많이 있다.

헤라클레스의 탑

헤라클레스의 탑

헤라클레스의 탑

헤라클레스의 탑

헤라클레스의 탑

헤라클레스의 탑 지하유적

헤라클레스의 탑 세계문화유산 각판

헤라클레스 탑

헤라클레스 탑 지하유적

헤라클레스 탑을 오르는 계단

헤라클레스 탑을 오르는 계단

헤라클레스 탑을 오르는 계단

헤라클레스 탑을 오르는 계단

    국가 : 스페인(Spain)
    좌표 : N43 23 9,W8 24 23
    등재연도 : 2009년
    헤라클레스의 탑 :
    기원전 61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직접 이끌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의 해양 탐험대가 오늘날의 라 코루냐인 브리간티움(Brigantium)에 상륙했다. 이곳에 항구와 상업을 위한 정착촌을 세울 목적이었다. 이 시기에는 지중해에 면한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의 해안 지방과 남쪽, 남서쪽을 따라 기원전 2세기부터 이미 로마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브리간티움의 항구는 칸타브리아 전쟁(Cantabrian Wars, 기원전 29~19)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단 평화를 찾은 후에도, 비스케이(Biscay) 만 입구에 있는 전략적인 해상 요충지로서의 역할과 무역 사무소 역할은 보다 굳건해졌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을 무렵, 이 지역의 갈리시아(Galicia)가 영국 제도를 점령하기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했다.

    파룸 브리간티움(Farum Brigantium)이라고 불린 이 탑은 1세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트라야누스(Trajanus, 재위 98~117) 황제 시기의 말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은 작은 부속 구조물에 새겨진 봉헌사에 담겨 있다.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의 라 코루냐 항구의 입구에 있는 이 기념비적인 등대는 지중해와 중서부 유럽을 연결하는 바닷길의 전략적인 요충지로서, 바위투성이의 갈리시아 해안선을 따라 오고가는 항해에 도움이 되도록 고안되었다.

    바다쪽 정면으로 열려 있는 은신처 안의 정상에는 단이 있는데, 나무로 불을 피우는 장치가 발견되었다. 배가 항구로 들어오기 어려운 경우에 항해를 도와주기 위한 단이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구조물을 토대로 계산해 보면, 본래의 탑은 수평 단면이 11.75㎡였을 것이다. 그리고 단까지 나선형의 진입 경사로가 있으며, 탑의 기단은 18㎡의 정사각형 토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 탑을 등대로 이용한 것은 로마 제국 전반에 걸쳐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어 주요 지형지물과 감시탑으로 역할을 했지만, 고중세시대(High middle age)에는 대부분 등대에 불을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명 사전의 목록을 보면 9세기와 10세기에 파룸(farum)과 파로(faro)라는 이름이 나와 있는데, 역사적 맥락과 해상 항해의 여건에 따라 야간에 등대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세 시대에 이 탑을 이용하고 관리했는지의 여부는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바이킹 침략의 시기(854~856)에는 도시와 함께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하지만 10세기의 기록에서는 다시 파룸 프레칸티움(Farum Precantium)으로 언급되어 있다.

    중세 연대기는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같은 장소에 요새와 작은 마을이 건설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헤라클레스의 탑은 카스텔룸 파룸(Castellum Pharum)이라고 불렸다. 이 당시에는 탑을 방어용과 감시용으로 이용했는데, 그 덕분에 폐허가 되지 않고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 크루니아(Crunia)가 된 부르고 데 파로 노보(Burgo de Faro Novo)의 도시와 항구의 발달은 12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이는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의 통치 기간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순례와 관계가 있다. 현대의 지명 연구에 따르면, 이 당시 헤라클레스 탑을 불렀던 ‘투린 데 파로(Turrin de Faro)’라는 이름은 이 탑을 다시 등대로 이용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전 시대에 탑을 방어 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외부의 진입 경사로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 후기에는 탑이 무너진 부위에서 떼어낸 마감용 돌을 다시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1557년에 시에서 그런 행위를 금지했다.

    14세기부터 라 코루냐는 스페인 왕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제항으로 성장했다. 라 코루냐는 북유럽과 지중해 사이의 핵심적인 무대였고, 이 당시에 등대의 기능을 완전히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 헤라클레스의 탑은 이 도시의 중요한 상징이었고, 도시의 도장에도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도상학에서 탑이 매우 훌륭하게 복원된 모습이 나타나 있다. 탑은 둥근 지붕 모양의 등이 잘 들어맞은 상태로 복원되었다. 외부 진입 경사로는 없었지만 그 나선형의 흔적은 아직까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목재 계단 공사에 관해서도 같은 시기에 언급하고 있다.

    17세기에도 탑에 대해 묘사한 것이 몇 가지 남아 있다. 최초로 정확하게 확인이 가능한 기록은 우세다(Uceda)의 공작이자 갈리시아의 총사령관이 1684년~1685년에 복원 공사를 실시했다는 것이며, 목재 계단에 대한 작업을 이 시기에 언급했다. 1755년에 리스본(Lisbon)의 대지진으로 라 코루냐 지방의 많은 건물들이 영향을 받았지만, 헤라클레스의 탑은 그 건축 설계와 모르타르의 품질 덕분에 지진을 견뎌냈다.

    탑을 대규모로 복원한 재건축 공사는 18세기 말에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1788년부터 1806년까지 항해상의 이유, 탑의 외부 상태, 조명 체계의 변경 등을 이유로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는 해군 기술자인 유스타키오 지아니니(Eustaquio Giannini) 중위에게 의뢰했다. 공사에 앞서 계측과 설계를 먼저 진행했는데, 이 작업은 당시의 이 탑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이 당시 탑의 높이가 현저히 높아졌고, 새로운 종 모양 등을 장착하는 데 알맞은 형태가 되었다. 내부 계단도 새로 만들었고, 외부의 외장과 입구를 완벽하게 복원했다. 그 결과 현재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외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추가 공사는 유스타키오의 형제인 호세 지아니니(José Giannini)가 1799년부터 1806년까지 진행했다. 운영상의 이유와 최근의 혁신적인 기술을 수용하기 위해 등과 조명 체계를 변경했으며, 종탑은 새로운 더 높은 탑으로 대체되었고, 탑의 기단 둘레에 단을 추가했다.

    1847년에는 광학 체계가 다시 바뀌었다. 이 체계는 프레넬(Fresnel) 렌즈를 이용해 매우 효과적인 반사 굴절이 일어난다. 1860년대에는 보조 건물들을 세웠고, 진입로를 보수했다. 1905년에도 추가 공사가 이어져 내부 계단이 다시 복원되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한 석조 계단으로 바꾸었다. 1926년에는 등대를 전기 조명에 적합하도록 바꾸었고, 여기서 보내는 빛은 최대 32해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볼 수 있었다. 1990년대에 19세기 초반에 추가로 덧붙인 단 아래에 있는 탑의 기단을 발굴, 조사했고, 그 결과 로마 시대의 기단과 매장되어 있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1년~1992년에 탑과 작은 로마 건물의 외관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중세 시대부터 19세기까지 탑의 역사를 둘러싼 수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왔다. 이 전설들은 역사나 고고학적 이해와는 별개로, 신화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에서 헤라클레스 탑의 기원과 건축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전설을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켈트-아일랜드 전통의 브레오간(Breogán) 전설, 그리스-로마 전통의 헤라클레스 전설(현재 탑의 이름이 된 괴력을 지닌 반신반인의 인물), 그리고 앞의 두 전설 사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트레센조니오(Trecenzonio)의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신화 이야기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14세기부터 전해졌다는 증거가 있는데, 아마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등대가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등대와 뗄 수 없는 일부분인 광학 체계에 대한 설명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또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서양 항해와 관련해 이 등대가 겪어야 했던 변화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라클레스의 탑 [Tower of Hercules]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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