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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haux-de-Fonds/Le Locle watchmaking town-planning] 요약 : 라 쇼드퐁·르 로클 시계 제조 계획 도시(La Chaux-de-Fonds/Le Locle watchmaking town-planning) 유적은 스위스 쥐라(Jura) 산맥의 외딴 곳, 농업이 적합지 않은 지형에 인접해 있는 두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의 배치와 건물들은 시계 제조업자들의 필요에 맞게 합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초, 큰 화재가 난 후에 이 도시들을 시계 제조만을 위한 도시로 만들었다. 주택과 작업장이 뒤섞여 두 줄로 나란히 배치된 모습은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 지역에서 시계 제조 문화가 필요했음을 반영한다. 이 지역은 보존 상태가 좋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단일산업 제조업 도시의 전형이다. 두 도시의 시계 제조는 가내공업 형태의 장인 생산 체제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집중적인 공장 생산 체제로 변했다. 두 도시의 도시계획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자신의 저서 『자본론(Das Kapital)』에서 쥐라 지역의 시계제조 산업의 노동 분업을 분석하면서 라 쇼드퐁 도시를 ‘거대한 공장 도시(huge factory-town)’라고 묘사했다.
라쇼드퐁 시계제조 계획도시
라쇼드퐁 시계제조 계획도시
국가 : 스위스(Switzerland)
좌표 : N47 6 14,E6 49 58
등재연도 : 2009년
라 쇼드퐁·르 로클 시계 제조 계획 도시 :
쥐라 고원에는 비교적 늦은 시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작은 산악 마을 라 쇼드퐁·르 로클의 지명은 중세 말까지는 없었다. 작은 마을 라 쇼드퐁이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그러나 이 두 자치 마을은 17세기 중반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라 쇼드퐁·르 로클에서 시계 제조가 시작된 것은 17세기 말, 다니엘 잔리차드(Daniel Jean-Richard)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18세기의 유명한 기업들이 있었다. 근로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시계 제조 활동은 근로자들 사이에서 분업화되었다. 점차 근로자들은 특정 부품 제조에 전문성을 가졌다.
제조한 부품은 주문한 조립업자에게 전달되었고, 조립업자는 마을에 있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시계의 기본 부품들을 조립하여 시계를 완성했다. 또는 제네바나 파리에서 온 시계 제조업자에게 기본 부품들을 팔았다. 기술 전문가가 많이 필요했지만, 노동이 분업화되어 있어 필요한 노동력은 비교적 신속히 훈련시켜 충분히 운영할 수 있었다.
18세기에는 쥐라 북부의 농가도 이런 종류의 활동을 하게 되었다. 방과 조명과 시간만 있으면 긴 겨울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의 조립 시스템은 인접한 라 쇼드퐁·르 로클과 라 쇼드퐁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문화되고 있었다. 시계 제조를 하던 마을 주택은 나중에 농장을 사들였다.
2, 3층으로 지은 수수하지만 기능적인 건물에는 작업 장인 몇 가족이 살 수 있었고 그들의 작업실도 둘 수 있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임대시설들이 군락을 이루게 되었다. 1870년에는 스위스 시계 제조 노동자들의 약 90%가 집에서 일을 했다.
1794년의 라 쇼드퐁 화재와 1833년과 1844년의 라 쇼드퐁·르 로클 화재로 이 두 시계 제조 산악마을은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도시계획을 재설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시계 제조업의 발전에만 전념하는 마을로 발전시켰다. 모와즈 페레장띠(Moïse Perret-Gentil)와 건축기사 찰스헨리 주노드(Charles-Henri Junod)가 이 계획에 참여했다.
1750년부터 1830년까지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다. 특히 라 쇼드퐁에서는 1830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도시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 당시 라 쇼드퐁의 인구는 40,000명 정도였고, 라 쇼드퐁·르 로클의 인구는 13,000명 정도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1857년에 두 도시 사이에 철도가 놓였고 곧 뇌샤텔(Neuchâtel)까지 이어졌다. 철도는 긴 띠 모양의 도시 구조에 아주 잘 맞았다. 철도는 교통의 기능을 넘어 초기 도시의 선택권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고, 계곡의 축을 따라 개발을 부추기기도 했다.
도시계획을 확대하고 상하수도 체계를 보강했으며, 가장 최우선으로 한 것은 위생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시계 제조업자들은 여러 가지의 시장 압박에 대처해야 했다. 생산량 증가, 저임금에 고가의 품질 요구, 다른 제조 사업 모델에 기초를 둔 미국과의 경쟁 여파 등이 그것이었다.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다. 정밀 기계를 이용하여 완전히 교체 사용이 가능한 표준화된 부품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시장의 새로운 요구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뇌샤텔(Neuchâtel) 산악 지역의 시계 제조 산업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이 경쟁에 적응했다. 통합 공장을 만들고, 주택에 붙은 공장을 더 확대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존의 모양대로 도로에 인접한 바둑판 모양은 유지했다. 스위스의 시계 제조 산업은 이전의 아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한층 더 강화되어 다시 세계 시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1930년대의 위기는 이 지역에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스위스의 시계 제조 산업은 공적 통제를 받는 카르텔을 형성하여 위기에 대처했다. 양 대전 사이에 처음으로 인구가 줄었는데, 특히 라 쇼드퐁에서는 더 심했다. 그러다 전후 30년간의 발전 시기(1945~1975)에 인구가 상당히 늘어 20세기 초에는 이전 기록을 넘어섰다.
1970년대에 또 한 번 산업 체계에 냉혹한 변화가 몰아닥쳤다. 외국에서 수정(quartz crystal)과 전자기술이 갑자기 밀려들어온 것이다. 이는 시계 제조업에 급격하고도 과감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몇 년간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고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또다시 대적할 상대가 없는 위치에 올라섰다. 시계 제조 종사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인구도 감소하고 있지만, 이는 산업계에 자주 일어나는 일로, 심각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위기는 아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 쇼드퐁·르 로클 시계 제조 계획 도시 [La Chaux-de-Fonds/Le Locle watchmaking town-planning]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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