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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처 責任다한 忠烈公 鄭蓍(정시)

eorks 2024. 5. 13. 11:18

                     목숨 바처 責任다한 忠烈公 鄭蓍(정시)

 

★쌀 두섬을 내어 줘라★


1811년에 정 시는 가산 군수가 되었습니다. 즉 가산이라는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님이 된 것입니다.  정시는 무인이 었으나 백성을 다스리는데 자상 하기 짝이없

었습니다. 한번은 백성들 중에서 아저씨와 조카가 쌀 두섬을 가지고 재판을 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당하자 정시는 크게 탄식을 하였습니다. 


"허" 이게 무슨 일인가? 아저씨와 조카 사이에 응당 우애롭게 지내고 서로 도와야 

지 않겠는가? 그러 하거늘 사소한 쌀 두섬 때문에 재판을 하다니... 이는 내가

어질지 못하고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기 때문에이다. 


책임은 나에게 있다. 정시는 자기의 쌀 두섬을 내어 주어 재판을 하지 말라고 하

였습니다. 쌀 두섬을 서로 가지 겠다고 다투더니 공으로 쌀 두섬이 생겨 아저씨와

조카는 화해 하였습니다. 

정시는 백성의 잘못을 꾸짖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알아 반성 하였던 것 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며 공평하게 다스렸겠습니까? 

이해 겨울에 서북부 지방에서는 큰 반란이 일어 났습니다. 홍경래 라는 자가 주동

이 되어 많은 무리를 모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 던 것입니다.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많은 백성들이 슬금 슬금 달아 났습니다. 
어떤자가 정시에게~~~ 

"원님,장차 반란이 일어 날듯 합니다. 어서 피 하시어야 될 것입니다." 
"나는 나라에서 한 고을을 맡은 사람이다. 그러한 내가 반란이 두려워 서야 되겠

냐?" 

정시는 단호히 거절 하였습니다. 이때 정시는 아버지인 정노를 뫼시고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가 아범님게 여쭈었습니다. 

"아버님 들리는 말에 반란이 있을 거라고들 합니다. 어찌 하는게 좋겠습니까?"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면 목숨을 걸고 직분을 다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 이니라." 
"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아버님게서는 어서 피하십시요." 
"아니다. 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알고서 나 혼자서 살려고 구차하게 달아나

지는 않겠다." 

이때 정시는 옆에 있던 아우 정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아버님께서 여기 계시는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장 위험이 눈앞에 다가 왔으나 이들은 태연 하였습니다. 정시는 직접 가까운

백성들의 집을 찿아 다니며 권 하였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란이 일

어 나거든 막아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딱하다는 듯 처다 보거나 슬금슬금 달

아 났습니다. 정시는 관아로 돌아와 관복을 갖추어 입고 단정히 않아 있었습니다.

손에는 관인을 쥐고 있었습니다. 관인이란 것은 그 직책을 나타내는 도장 입니다.

 

★목숨은 줄 수 있어도 관인만은★


12월 18일 밤에 반란을 일으킨 무리는 관아로 들이닥쳤습니다. 

"가산 군수는 뜰에 내려 항복 하라." 
"이놈들 너희가 내게 항복 하라. 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엄히 다스리리라." 

정시는 꿋꿋이 서서 꾸짖었습니다. 

"무릎꿇어 항복하지 않겠느냐?" 
"못 한다." 

그러자 한 자가 칼을 들어 정시의 정강이를 후려 쳤습니다.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시는 앞으로 쓰러졌으나 당당한 기세는 꺽이지 않았습니다. 

"이놈들 반란을 멈추고 어서 물러 가거라." 
"관인을 내 놓아라." 
"관인은 나라에서 받은 것이고 이 고을의 수령이라는 증거다. 어찌 너희 에게 내 

주 겠느냐?" 

한 자가 칼을 들어 관인을 움켜쥔 오른 팔을 내려 쳤습니다. 팔이 댕강 잘려져 나

가고 피가 어지럽게 쏟아졌습니다. 정시는 얼른 왼 손으로 관인을 주워들고 외쳤

습니다. 

"내 머리는 줄 수 있어도 이 관인은 줄 수 없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는 외쳤습니다. 

"지독한 놈이로구나, 저놈을 죽여라, 여럿이 덤벼들어 마구잡이로 칼질을 하여 정

는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는 안으로 들어가 정노를 잡아내

였습니다. 

"이놈 네 자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아라, 우리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이 

이 된다. 너는 항복 하겠느냐?" 

늙은 정노는 단호 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벼슬자리에 있지 않으나 어찌 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무리 에게 항 복을 할

까 보냐?" 
"이놈이" 
"너희를 따를 수는 없다." 
"이 늙은이가!" 

칼이 내려쳐 졌으며 정노는 피 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정저가 뛰어나와 와쳤습니다. 

"우리 아버님을 살려주고 대신 나를 죽여라." 

그리고는 쓰러진 아버지 위에 엎드려 몸으로 막았습니다. 

"이 것들이 하나같이 독 하구나," 

이놈 저놈이 마구잡이로 칼질을 하다가 물러 갔습니다. 반란은 가산만이 아니라

러 고을로 번져 갔습니다. 이들이 가산의 관 아에서 물러 간지 한참 뒤에 한 여

인이 여기에 나타 났으니 가산의 관아 에서 일하는 연홍이라는 기생 이었습니다.

연홍은 조심 스럽게 살펴 보니 정시와 정노는 이미 죽었으며 정저는 심 한 부상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목숨은 붙어 있었습니다. 연홍은 믿을만한 사람을 데려

다가 정시와 정노를 관에 넣게 하였으며, 정저는 자기집으로 업어가게 하여 몰래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정성으로 정저는 살아 났습니다. 

정시가 평상시에 타고 다니던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소란 속에서 반란을 일으

킨 무리의 것이 되었으며, 어느 대장이 타고 다녔습니다. 얼마후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서 큰 싸움이 일어 났습니다. 이때 그 말은 갑자기 크게 울부짖더니 정부군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흔 들어 등에 탄 자를 떨구어 내었습니다. 

즉 정부군은 반란을 일으킨 무리 의 한 대장을 사로 잡은 것입니다. 
말이 주인을 닮아서 그랬던지 주인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서 그랬던지 아뭏든 큰

공을 세운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정시와 정노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 으니 충신

이었습니다. 
정저는 아버지를 위하여 몸을 바쳐 대신 죽고자 하였으니 효자였습니다. 

연홍은 주인을 위하여 어려운 일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의로운 기생이라 하였습

니다. 

말은 사람이 아니나 주인을 잊지 않고 나라에 공을 세웠다 하여 의로운 말이라고 

들 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후에 정시에게는 병조판서의 지위를 내리고 표절사라는 사 당에 모시

게 하고, 충렬공 이라는 시호
를 내리셨다. 정노에게는 참판이란 벼슬을 내리고, 충렬사라는 사당에 모시게 하

였 습니다. 정저에게는 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연홍에게는 많은 상을 내렸습니다.

 

★주인을 잊지 않은 의로운 말★


정시는 1768년에 태어나 1799년에 무과라는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무과라는 것은 장수가 되는 과거 였습니다. 그후 선전관, 훈령원주부 등의 벼슬을

지내고 1811년에 가산 군수가 되 었던 것 입니다. 가산 군수가 된지 몇달이 되지

않아서 홍경래의 반란을 만났으며 충성 스럽게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정시는 키

가 흘적 크고 활을 잘 쏘았습니다. 활을 쏘는 자리에서는실없 는 농이 오가기를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시는 그저 빙긋이웃을 따름 이요 그러한 농에 썩이지 않았

습니다. 

사나이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생각 하였으며 농은 입에 올리지 않는게 좋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자리에서는 흔히 내기를 하였습니다. 즉 진 사람은

이긴 사 람에게 술을 사거나 돈을 주는 따위의 내기 였습니다. 이런 데에도 정시는 

휩쓸리지 않고 그저 빙긋이 웃을 따름으로 활쏠 차 례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자네도 한 번 내기를 해 보게나," 
"아니," 
"내기를 걸고 활을 쏘면 한결 잘 쏘아지거든, 그리고 자네는 솜씨가 뛰어 났으니

내기를 하면 언제나 이길 걸세,"
"난 그런것 좋아하지 않거든...,"

정시는 역시 빙긋이 웃을 따름으로 끝내 내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정시는 공

연히 밖에 나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벼슬하는 사람들은 웃사람이

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찾아 다니며 문안 드리고 끼웃거리 기를 잘 하였습

니다. 그 것은 제 얼굴을 알리고 그럼으로 해서 출세나 해 볼까 하는 속셈에서

였습니다. 정시는 나다니기를 삼가고 꼭 찾아가 봐야하는 일이 없이는 웃사람이 

나 높은 지위의 사람을 찾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 비루한 짓을 할 성품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시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 였습니다. 정시는 정성으로 아머지

를 봉양 하였습니다. 언제나 옷을 단정히 입고 문안을드렸으며 식사를 잘 하는가

를 살펴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잘 잡숫는 것을 보고 이렇게 혼잣말로 하곤 했습니

다.

"이렇게 내가 아버님을 봉양 할 수 있는 것도 다 임금님의 은혜로구나,"

자기 자신은 언제나 소박하게 먹었습니다.

"어머님을 잘 봉양해 드리지 못하는데 어찌 내가 풍성하게 차려놓고 먹 겠는가?"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셨기에 오래오래 효도를 못하는 것을 아쉬워 하였 던것입니

다. 한번은 정시가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고향에 

있던 부인이 다소 토라저서 말 하였습니다.

"이 입고 있는 옷을 보십시요,"
"그 옷이 어떻단 말이오?"
"낡아서 여기저기 기웠으니 볼품이 없지 않습니까?"
"허허 ,그렇소?"

정시는 그저 대수롭지 않는 대답이 었습니다.

"장부로서 이미 벼슬을 하고 계시니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집 안 사람 옷

하나 못 해 주십니까? 한번 번듯한 옷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시는 역시 대수롭지 않는 대답이었습니다.

"허허, 그럴수는 없구료, 우리 집안에서 번듯하고 호사한 옷을 부인에 게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나만이 부인에게 그런 옷을 해 줄 수는 없구료,"
"....................."

부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정시가 옷을 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옷이란 몸을 가리면 되 는 것이지 사치하게 차릴 필요는 없다고 타이른 것입니다.

정시는 뛰어난 인물이고 충신이며,그 장렬한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켰습

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말없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 니다. 발취한 자료는 여기 까지 

입니다.

후일 홍경래난이 평정되고 김삿갓(김병천)시인 부친이 홍경래 란에 동조 하여 삼

족이 멸족하는데 삿갓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성장 하여 정씨가문에 저런

충신이 탄생 했는데 하늘보기가 부끄럽 다고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글은 소년중앙 1980년 1월호에서 발취했습니다.)발취자 鄭泰鎬
※선생은 청주 정씨(淸州鄭氏)로 자는 덕원(德圓), 호는 백우(伯友)이며, 처사

(處士) 노(魯)의 아들로 한강(寒岡)의 8대손이다. 1768년(영조 44년), 수륜면 수

성동 갓말에서 태어나 1811년(순조 11년) 가산군수로 홍경래의 난(洪景來亂)에 

순국(殉國)했다.


표절사 (表節祠)
북한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에 있는 가산군수 정시와 임신칠의사 관련 사당.

문화재자료.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가산군수 정시(鄭蓍)를 비롯한 임신칠의사(壬申

七義士)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평안도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건

립되었다.
정시는 난이 발발한 직후 군민을 모아 적에 대항하려다 사로잡히자 투항을 거부

하여 살해당하였다.

나머지 6인의 의사는 한호운(韓浩運)·백경한(白慶翰)·박지환(朴之煥)·허항

(許沆)·제경욱(諸景彧)·김대택(金大宅) 등인데, 이들도 난중에 의(義)를 지켜

모두 죽었다.
1824년(순조 24) 장령 박영현(朴榮顯)이 이들을 제향하는 사우가 건립되어 있

으니 사액을 내려 충절을 장려하도록 상소하였다. 이에 묘당(廟堂)에서 논의를

거쳐 표절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지방관에게 봄·가을 향사(享祀)에 제수(祭需)

를 지원하도록 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훼철 때에도 대상

에서 제외되어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