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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란 지명 유래(地名 由來)

eorks 2024. 9. 23. 13:57

♡서울이란 지명 유래(地名 由來)♤
   
      우리나라의 도시 이름을 살펴보면 대개가 한자를 사용한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시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래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제일 먼저 궁과 성을 건축했는데 정도전과 무학은 종교적 사고
      와 유교적 바탕을 앞세워 서로 강한 주장을 펼쳤다. 
     
      두 사람의 이러한 태도는 성역(城役)을 정하는 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재 청와대 옆산인 인왕산 북쪽에 선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성 안쪽으로 하
      자는 무학의 주장과 성 밖으로 하자는 정도전의 주장은 이태조가 민망스러워
      할 만큼 팽팽했다. 
     
      그 바람에 다른 도성은 다 쌓았는데 인왕산 선바위 부근만 미완성으로 남았다. 

      두 사람의 의견대립으로 공사가 진척되지 않던 어느 날 아침, 밤새 첫눈이 얼마
      나 많이 내렸던지 한양 땅이 모두 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아침 일찍 눈 구경을 하던 태조는 낙산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도 성 안쪽으로는 눈이 보이지 않고 바깥쪽에만 눈이 쌓여 있었다. 

      태조는 별감들을 보내서 보고 오라고 하였다. 
      다녀 온 별감들이 아뢰기를 ‘성곽 밖으로만 눈이 쌓였고 안쪽은 맨 땅이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하도 기이한 일이라 태조는 하늘이 한양의 경계를 알려 주려고 그러는가보다
      여기며 별감들에게 다시 궁궐 옆 산 인왕산 선바위 주변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
      였다. 

      다녀 온 별감들은 선바위를 중심으로 안쪽은 눈이 없고, 바깥쪽은 눈이 쌓였다
      고 했다. 
     
      태조는 정도전과 무학을 입궐케 하여 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로써 선바위 안쪽으로 성곽을 쌓게 되었는데 이날 내린 눈이 성곽 안쪽과 바
      깥쪽의 경계를 뚜렷하게 제시해 주었다하여 눈 울타리, 눈 설, 울타리 울, 눈과
      울타리라는 뜻으로 설울(雪鬱)이라고 해서 1945년 해방 이후 설울을 서울이란
      세련된 지명으로 갖게 되었다. <이형표 철학박사>



      서울 명칭이 수도로 된 이면에 또 다른 연원이 있어 소개한다.

      서울의 어원은 신라시대의 경주의 옛 이름인 서라벌에서 근거했다는 설이 정설
      이지만 눈으로 인해서 서울의 이름이 생겼다는 설을 믿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서울 명칭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백제 때는 위례성, 한산이라 불렀고, 고구려
      때는 북한산군 남평양, 신라 때는 북한산주 한양군, 고려 때는 양주 광릉 한양
      부, 조선왕조 때는 한성부, 일정 때는 경성부,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자유시로 바
      뀌었다가 지금은 서울특별시로 부른다.

      서울이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지정학적 의미는 다른 어느 곳보다 중요하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 해 있어 통치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한강을 통하여 대량의
      물자 수송이 가능하고 중국에 내왕하기 편리한 잇점도 갖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이곳으로 진출했기 때문이요, 백제가 쇠
      퇴한 것도 여기를 빼앗긴 것이 한 원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을 갖춘 지역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
      다. 그러나 서울이 수도로 결정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
      랐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정권을 잡아 그 궁궐에서 살다 보니 마
      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것이 전 왕조 때 쓰던 것들이요, 궁인들도 그 사람들이
      다. 

      더구나 백성-고려 유신들이 협조하지 않아 극심한 갈등을 겪던 중 두문동 사건
      까지 터지자 이태조는 개성을 하루 속히 벗어나고 싶었다. 

      등극한 첫 해에 한양으로 천도하는 문제를 검토하도록 도평의사사(후에 의정
      부)에 명했던 것도, 이염을 시켜 한양에 있던 궁전을 수리케 했던 것도 그런 심
      리상태에서 나왔다. 
     
      그러나 신하들은 조급하게 서두르는 임금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대표자인 조준(趙浚)은 천도를 서두르지 말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졌다. 

      몇 달 지나서 이번에는 계룡산 기슭이 좋다는 권중화의 제의로 태조가 직접 답
      사 하고 결정하여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이번에도 하륜, 성석린 등이 반대하여
      또 벽에 부딪혔다. 

      하륜은 무악(신촌 근방)이 좋다고 하였으나 서운관(기상-풍수지리를 맡았던 관
      청)에서 부정적으로 보아 무산되었다. 

      수원, 적성, 임진, 도라, 부소 등이 후보지로 대두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태조는 천도사업이 늦어지자 무학대사에게 그 문제를 맡겼다. 

      무학이 전국을 순회하던 중 한강을 배타고 올라가다 보니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그 가운데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좋아 보였다. 

      내려서 한참 들어가 보았다. 

      그 때 옆에서 밭갈이 하던 농부가 ‘이랴, 이 무학보다 무식한 소야, 바른 길을 두
      고 굽은 길로 가는구나.’하는 것이 아닌가. 

      무학이 깜짝 놀라 농부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서
      쪽을 가리키면서 ‘십리만 더 들어 가보라.’고 했다. 

      무학이 십리를 더 들어 가보니 북쪽에는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사방이 산으로 둘
      러싸인 가운데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도 높은 산이 있어 아늑했다. 

      이런 지형이라면 자연재해나 병란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왕에게 아뢰니 태조
      는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대신들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 그 곳이 도읍지로 결정되었다. 

      무학이 섰던 자리가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였다고 추측된다. 
      무학에게 십리만 더 들어가 보라고 했던 자리는 후에 왕십리라는 이름이 붙여
      졌다.

      공사는 정도전이 하였다.

      종묘와 사직, 궁전을 짓고, 기간 시설을 마친 후에 민간이 살 터전을 궁(弓)로 분
      할하고  수도를 둘러 쌀 성을 쌓을 자리를 찾던 중 눈이 많이 온 아침 산 위를 보
      니 눈으로 울타리를 친 것 같았다. 

      그 경계대로 성을 쌓은 것이 북악, 인왕, 낙타, 남산을 잇는 한양성이다. 

      그 때 쌓였던 눈 울타리(雪圍)의 줄임말인 ‘설울’이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고 한
      다. <한국민간전설집>

      서울 지명의 유래는 위의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나는 후자가 맞는것 같다. 

      '설울'에 답답울 (鬱)자 보다는 울타리  위(圍)자가 변하여 '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이형표 박사는 서울 명칭의 근원을 눈 울타리, 눈 설, 울타리 울, 눈과 울타리라
      는 뜻으로 설울(雪鬱)이라고 했는데 한국민간 전설집에는 눈 울타리(雪圍)의 줄
      임 말인 ‘설울’이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고 한다.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