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의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제 인생에 종말이 가까워져 오는 제 몸이 몹시 괴롭습니다. 그런데 옛 선인(先人)들은 ‘괴로움과 즐거움은 일상에 항상 있다,’고 말씀하셨네요.
바로 그 말씀이 고락상평(苦樂常平)입니다. 고(苦)와 락(樂) 간에 한쪽에 치우치면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고해(苦海) 라고 흔히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은 살아가면서 괴로움과 근심이 항상 따라붙지요.
아무리 금수저로 태어난 행운아라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다 있고,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고팔고(四苦八苦)』에 대해 말씀 하셨지요.
<사고(四苦)>는 인생에서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네 가지 괴로움을 뜻합니다.
첫째, 생로병사(生老病死) 입니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의 네 가지 고통을 말하지요.
둘째, 애별리고(愛別離苦)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을 말합니다.
셋째, 원증회고(怨憎會苦) 입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을 말합니다.
넷째, 구부득고(求不得苦) 입니다.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팔고(八苦)>는 이 사고(四苦)에 다음의 네 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바로 ‘오음성고(五陰盛苦)’이지요. 즉, 오온(五蘊)에 의해 생기는 고통을 말합니다. 오온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하지요.
석가모니는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고해에 던져 진 보통 사람들은 ‘즐거움과 슬픔은 이웃 사 촌’, ‘고통은 짧고 기쁨은 영원하다’ 등등의 선인들의 말에 위로를 받습니다.
<채근담(菜根譚)>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맛본 후에 얻은 행복이 오래 간다.’라고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은 일상에 항상 있는 것이고, 서로 바뀌어 오고 가는 것이므로, 너 무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다산이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 은거해 있을 때, 지역 병영에서 우후(虞侯)로 있던 ‘이중협’ 이라는 무관이 가끔 찾아와 분위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요. 3년 여를 그렇게 출입하던 그가 한 번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임기가 끝나 서울로 가게 됐다고 했습니다.
섭섭한 표정의 그를 위로하느라 다산이 시를 지어주고, 서문을 쓴 것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남아 있습니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이란 즐거움의 뿌리다. (樂生於苦 苦者樂之根也/ 낙생어고 고자락지근야),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이란 괴로움의 씨앗이다. (苦生於樂 樂者苦之種也/ 고생어락 낙자고지종야),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낳는 이치는 움직임과 고요함, 음과 양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苦樂相生 如動靜陰陽 互爲其根/고락상생 여동정음양 호위기근)』
그러면서 3년 간이나 자주 찾아와 글을 써서 주고받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서글프지만 이후 고향에서 만나면 더욱 기쁠 수 있으니 슬퍼하지 말자고 다독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이 일상 속에 계속 즐거운 일만 계속되면 좋으련만, 그런 행운은 있을 수 없지 요.
또 좋은 일이 계속되고 고통은 찾아오지 않으리라 기대하지만, 그 즐거움이 비극이 될 수 있어 ‘낙극생비(樂極生悲)라 했고, 흥함이 다하면 슬픔이 찾아온다(興盡悲來)’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고진감래(苦盡甘來)라, 고생을 참으면 즐거움이 따른다’ 라고 했지요.
우리 현실이 괴롭다고 좌절할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苦)와 낙(樂)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고 속에서 낙 을 찾고 낙 속에서 고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네요. 아무리 생로병사 가 고통이라지만, 이 육체의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이런 것을, 바라면 도둑의 심보일 것입니다.
저의 이 육체적 고통도 끝이 올 날이 찾아오겠지요. 서해 낙조(西海落照)가 더 황홀한 법입니다. 그것이 해탈(解脫)이고, 열반(涅槃)이 아닐까요!
- 좋은 글 중에서 -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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