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얘기할 때면 우리나라의 경우 경주 최부 잣집을 떠 올리게 됩니다.
먼저 두 가지 감동적인 장면을 살펴봅시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 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 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 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 자에게는 부를 엄청나 게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오히려 흉 년 때 곡식 창고를 개방했습니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 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최부잣집은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합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 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합니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 름을 남긴 최부잣집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 도 않고, 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평가받을 자격 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 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
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뚝을 쌓아 대대적으 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는 것 이었다.
소작인들이 선호하는 선진적인 이 병작제의 적용으로 마을 사람들이나 노 비들은 적극적으로 최씨네 땅 개간에 협력했다.
농토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집안 사람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이용한 비료법도 적극적으로 활용 해 소출을 높였다.
이와 함께 이앙법을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 넓은 논을 경작하는 것도 가능 하게 했다.
그 결과 3대인 최국선에 이르면 가문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 으로 성장한다.
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으 며, 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가훈에 따른 선행으로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배앗긴 뒤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에 참 가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런 과 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최준은 대학을 설립해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인생 의 목표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운다(두 대학이 합해져 영남대학이 된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이렇게 해서 사실 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돼 돌아간다.”
경주 최부잣집은 그 역사적 전통만큼이나 가훈으로도 유명합니다.
6개조로 이뤄진 가훈을 한번 살펴 봅시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외침 때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 한 최진립은 병자호란 때 억울하게 귀양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의 뼈 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당부합니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최부잣집은 1년 소작료 수입은 1만석을 넘기지 않았으며, 그 이상은 소 작료 할인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다른 부잣집들이 소작료를 수확량의 70% 정도 받았다면 최부자는 40%에서 멈췄던 것입니다. 사 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 하는 게 우리네 인심이었지만 최부자가 논을 사 면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1년에 약 1,000석의 쌀을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별도의 뒤주를 둬 누구든 지 쌀을 가져가 다음 목적지까지 노자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부잣집의 인심은 널리 알려졌으며, 민란 등 사회 적 혼란기에도 폭도들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수천명씩 굶어 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갖고 있는 논과 밭을 그야말로 헐값으로 내다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부잣집은 이런 논과 밭을 결코 사들이 지 않았습니다. 부의 획득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부는 오래가지 않고 무너진다는 믿음을 가졌기 에 가능한 일이 었습니다.
5.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이 보릿고개 때는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 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시집 온 후 3년간은 무명옷만 입도록 했습니다. 근검절약을 실천적으로 가르쳣던 것입니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주변 사람이 굶어죽는데 나 혼자 만석꾼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쌀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누대에 걸친 이러 한 선행 덕에 최부잣집은 숱한 변란의 세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 11대조 최현식 때에 가문은 활빈당의 무장 공격을 받았지만 무 사할 수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부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경주 최부잣 집은 ‘제대로 된 부자의 길’을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