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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님의 詩
빈 상자들/ 장석주
빈 상자들이 창고 안에 쌓여있다
발톱도 없고 비늘도 없는
빈 상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쌓여있다
빈 상자들은 무엇인가를 그 안에
채우기 위해 빈 채로 쌓여있다
빈 상자 안의 공허로 가득 채워져 있는 동안
빈 상자는 다만 빈 상자로 불릴 것이다
빈 상자 속에 용이 담겨질 때
무엇으로 불려야 하는가
빈 상자 속에 생을 마감한 마르고 지친 한 육신이 눕혀질 때
빈 상자는 또 무엇으로 불려야 하는가
빈 상자 속에 무엇인가 채워지고
빈 상자는 어딘가로 이동한다
그것이 빈 상자의 기능이고
그것이 빈 상자의 운명이다
검은 기차를 타고
혹은 컨테이너선에 실려 이동할 때
빈 상자는 더 이상 빈 상자가 아니다
빈 상자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고
어디엔가로 옮겨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빈 상자들의 몫이 아니다
빈 상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
자살해버린 몇몇 빈 상자들을 빼놓고는
어떤 빈 상자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빈 상자라고 불러도 좋은가
중심을 비워둔 채
알 수 없는 자신의 미래를 조용히 기다리는 빈 상자들
저 어린 짐승처럼 순한 것들을
다만 빈 상자라고 불러도 좋은 것인가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빈 상자들은 비어 있을 때만
빈 상자일 수 있다고
모든 빈 상자들의 뒤에는 언제나
빈 상자들의 운명을 움켜쥔 피 묻은 손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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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참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옷은 곧 못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위를 버거워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소리나게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바지의 독재에 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언제까지나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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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장석주
함박눈 내리는 밤은
담요처럼 더욱 두터운 어둠.
차마 토해내지 못한 죄 몇 개가
뒤늦게 늑골 밑에서 괴로운 가시처럼 아프고,
온 천지엔 무책임하게 아름다운 폭설.
아스라한 길 끝에 눈길을 주고
모래내에서 신촌까지
명륜동에서 미아리까지
밤을 막막히 걸어본 적 있지,
누적된 생활의 피로가 무거운 어깨에
견장처럼 반짝이는 올해의 끝눈
널 만나지 못하고 지난 세월은 큰 슬픔이었다.
널 제철 잊고 잠시 피었다 진 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휴식이 빛나는 곳에선
따뜻한 등의 빛을 가슴에 안는다
그래도 어제 불던 바람 한 올
오늘 허공에서 자취 찾는 심사
가슴에 쥐어박히는 후회의 한 자락 때문에
막막히 걸어본 적 있지
막막하다, 지워지지 않는 그 사람,
막막하다,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그리움,
막막하다, 보상없는 이 삶의 쓰라린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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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발, 빗발 / 장석주
빗발, 빗발들이 걸어온다 자욱하게 공중을 점령하고
도무지 부르튼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얼마나 먼
데서 예까지 걸어오는 걸까... 천 길 허공에 제 키를
재어가며 성대제거 수술 받은 개들처럼 일제히 운다...
자폐증 누이의 꿈길을 적시며 비가 걸어온다... 봐라,
발도 없는 게 발뒤꿈치를 들고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과수원 인부의 남루를 적시고 마당 한 귀퉁이의
모과나무를 적신다...
묵은 김치로 전을 붙이고 있는 물병자리 남자의 응고된
마음마저 무장해제 시키며 마침내는 울리고 간다...
저 공중으로 몰려가는 빗발, 저 쬐끄만 빗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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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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