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이형기(李炯其)님의 詩

eorks 2007. 4. 9. 00:06

이형기(李炯其)님의

      1.-낙화(落花)-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2.<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 3.<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4. -호수(湖水)-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 5. -귀로(歸路)-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 숲 속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숭엄(崇嚴)한 가을이 아무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 6.<그 해 겨울의 눈> 그 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맥스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 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
이형기 : (李炯其,1933~ ). 경남 진주 출생.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문예>(1949)지에 <비오는 날>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제 2회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 초기에는 유미적, 전통적, 서정적 경향의 시를 쓰다가 후기에는 즉물적이며 격정적이 고 예리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창작함. 시집으로는 <적막강산>, <풍선심장>, <그 해 겨울의 눈> 등이 있고 수 필집으로는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이 있음.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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