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님의 詩
1.<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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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눈물>
마음 둘 데 없어 바라보는 하늘엔
떨어질 듯 깜빡이는 눈물 같은 별이 몇 개
자다 깨어 보채는 엄마 없는 우리 아가
울다 잠든 속눈썹에 젖어 있는 별이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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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신과 가는 길>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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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 세상에는>
이 세상에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외로움이 있읍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아픔이 있읍니다.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해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읍니다
당신은 그 외로움을 알고 있읍니다
당신은 그 아픔 그 그리움을 알고 있읍니다
다만 먼 곳에 계신 당신을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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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눈 내리는 길>
당신이 없다면 별도 흐린 이 밤을
내 어이 홀로 갑니까
눈보라가 지나가다 멈추고 다시 달려드는 이 길을
당신이 없다면 내 어찌 홀로 갑니까
가야 할 아득히 먼 길 앞에 서서
발끝부터 번져오는 기진한 육신을 끌고
유리알처럼 미끄러운 이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져도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기로 한
이 길을 함께 가지 않으면 어이 갑니까
스쳐지나가는 많은 사람중에
당신이 함께 있어서 내가 갑니다
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당신이 그 눈발을 벗겨주어
눈물이 소금이 되어 다시는 얼어붙지 않는 이 길
당신과 함께라면 바람과도 가는 길
당신돠 함께라면 빗줄기와도 가는 길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혼미하여 뒹굴다가도
머리칼에 붙은 눈싸락만도 못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당신이 항상 함께 있으므로 오늘 이렇게 나도 갑니다
눈보라가 치다가 그치고 다시 퍼붓는 이 길을
당신이 있어서 지금은 홀로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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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별>
당신이 처음 내곁을 떠났을 때
나는 이것이 이별이라 생각지 않았읍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고
나 또한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향해 있으므로
나는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것이 이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별은 떠날 때의 시간이 아니라
떠난 뒤의 길어지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합니다.
당신과 함께 일구다만 터밭을
오늘도 홀로 갈다 돌아옵니다.
저물어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돌아오면서
나는 아직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비록 내 곁을 떠나 있어도
떠나가던 때의 뒷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가다가 가끔은 들풀 사이에서 뒤돌아보던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뒤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가도
이 세상이 다 저물기 전의 어느 저녁
그 길던 시간은 당신으로 인해
한 순간에 메꾸어질 것임을 믿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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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어떤편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읍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읍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읍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읍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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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울음소리>
지금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울고 있읍니다
아무도 메꾸어 줄 수 없고
누구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없는
가슴 빈 자리 때문에 홀로 울고 있는 이가 있읍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통에 낯설지 않는 것이라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그의 울음이 너무 커서 지금은 말할 수 없읍니다.
지금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쓰러지고 있읍니다
아무도 바꾸어 설 수 없고
누구도 대신 갈 수 없는 길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묻고
뜨거운 돌자갈길을 걸어오며 가슴을 치는 이들이 있읍니다
아픔을 이기는 길은 그 아픔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절망을 이기는 길은 그 절망 끝까지 싸워 나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도
지금 그들에게는 이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서로 손잡아 주어야 할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 있읍니다
먼저 눈물 흘린 사람과
지금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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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 (1954 ~ )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하여 작품활동 시작.
시집:<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당신은 누구십
니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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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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