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람 하나가 성품이 교활하여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몹쓸 놈이라
했다. 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날 길에서 배(梨)장수를
만났다.
『여보 몇 개만 먹어 봅시다.』
하고 청했으나 워낙 인색한 배 장수라 듣지 아니하였다.
『내 너로 하여금 앙갚음을 할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배 장수보다 한 마장쯤 먼저 가서 길가 논 가운데 남녀 수십명이
모를 심는 것을 보고는 그 가운데 제일 나이 적고 아름다운 여인을
불러 가로되,
『아씨가 제일 어여쁘니 오늘 밤 함께 자 보는 것이 어떠냐?』
하고 희롱 하니 여러 사람이 이 소리를 듣고 크게 노하여,
『어떤 미친 놈이 와서 희롱하느냐?』
하고 좆아 오거늘, 서울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급히 언덕을 뛰어넘어
그 아래에 가서 앉아 한 손을 쳐들며 크게 소리치며 가로되,
『배(梨)를 지고 오는 형님! 빨리 오시오. 빨리 오시오!』
이 때 배장수가 마침 논밭 근처에 당도하니, 모심던 여러 수십 명이
달려들어 형님이란 소리를 듣고 배 장수의 덜미를 끌며,
『넌 저놈의 형인 모양인데, 네 아우의 죄는 네가 마땅히 당해야 할
것이다. 』
하며 주먹과 발길이 우박처럼 쳐왔다. 몸에 성한 곳이 없고 옷은 찢어
지고 배는 깨지고 흩어졌다. 배장수가 불의의 봉변을 당하고 애걸하
면서 가로되,
『저 언덕 아래에 있는 놈은 본시 내 동생이 아니오. 아까 길가에서
그 놈이 배를 달라기에 주지 않았더니, 이에 심술을 부려 여러분을
속여 나를 괴롭히니 여러분은 양해하고 나를 살려 달라』
여럿이 그럴싸 해서 매를 그치니 배장수는 겨우 일어나 배를 수습하
여 가니, 서울 사람이 언덕 아래에 앉아 있다가 길에서 배장수의 낭패
하여 오는 모습을 보고 가로되,
『그대가 배 두어 개를 아끼더니 이제 어떤고?』
배 장수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말이 없었다. 이 때 또 한 역졸
이 흰 말을 타고 지나가거늘 서울 사람이 말을 붙잡고 청하기를,
『내가 여러 날 길을 걸어 발이 콩멍석이요, 다리가 아파 죽겠으니,
요다음 주막까지 잠깐 말을 빌림이 어떠한 가?』
『너는 어떤 위인인데 말을 타고자 하느뇨? 나도 또한 다리가 아픈즉
다시는 그 따위 미친 수작 말라』
『네가 감히 허락치 않으니 내 마땅히 너로 하여금 봉변케 하리라.』
하고 눈을 부릅뜨고 말하니,
『시러배아들놈!』
하고 웃고 가거늘 서울 사람이 그 뒤를 따라 역졸이 주막에 들어간
것을 보고, 그 때 마침 주인 여자가 방 가운데서 바느질하는 것을
보고 창 밖에 서서 가로되
『낭자(娘子) 낭자여, 내 마땅히 밤 깊은 후에 와서 한 판 하리니, 이
창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라. 나로 말하면 아까 여기 흰 말을 타고 와
서 건너 주막에 와서 자고자 하던 사람이라.』
하니,
여인이 크게 놀라고 노하여 곧 그 말을 남편에게 고하니, 남편이 대로
하여 그 아들과 동생들을 거느리고 주막으로 달려들어, 아까 흰 말을
타고 온 사람을 찾으니, 역졸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응한 즉, 세
사람이 죄를 꾸짖으며 어지러히 후려치니, 온 몸이 중상이라 주막 주
인이 구해내며,
『이 사람은 저녁에 우리 집에 들어온 후 아직까지 창 밖에 나가지 아
니하고, 잠만 자고 있었으며 천만 애매하니 이는 반드시 그릇됨이라』
여러 손님의 말이 또한 그와 같았으므로, 반신 반의하여 간신히 풀어
주니, 이튿날 아침에 서울 사람이 먼저 길을 떠나서 몇 리 밖에 가서
길가에 앉았는데, 그 때 역졸이 기운 없이 말을 타고 오거늘 서울 사
람이,
『네가 어제 나에게 말을 빌리지 않더니 지난밤 액땜이 과연 어떠하
뇨? 오늘에 또 만약 말을 빌리지 않으면 마땅히 이와 같은 일을 또 한
번 당하게 하리라.』
하니 역졸이 크게 두려워 말에서 내려 잘못했음을 빌며, 하루 동안 말
을 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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