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8∼9년경의 일이었다. 기나긴 봄날의 해가 서산에 걸릴 무
렵, 서울 남산골에 살고 있었던 현직 승지 이모가 그 날밤 당직이어서
시간을 맞추어 대궐에 들어가기 위하여 북 다른 재(현재 명동 천주교
당)에 이르니 길가의 다 쓰러져 가는 조그마한 초가집 문 앞에 팔척
장신인 텁수룩한 노인이 망건도 쓰지 아니한 머리에 정자관(程子冠)
만 삐뚜름하게 얹고서 마치 이승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지나가
는 이승지의 남여(藍與) 앞을 가로막고 두 팔을 들어 길게 읍을 하는
것이었다.
이승지는 난데없이 길가에서 초면 인사가 그것도 몸차림이나마 제대
로 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인사를 받은 이상, 하는 수 없이 남여에서
내려와 답례로 읍을 하였다.
그랬더니 이 노인은 이승지에게 "영감 이 집이 내 집이오. 잠깐 들어
와 수어(數語)나 합시다" 하는 것이다.
이승지는 첫째 그 달갑지 아니한 모양도 눈꼴이 틀리고, 둘째로 번(番)
을 들 시간도 거의 되었으므로 "지금은 공무로 입직하러 가는 길이니,
이 다음에 필히 심방(尋訪)하겠소" 하며 남여로 올라가려 하니 그 노인
은 눈을 크게 뜨고 기세도 당당하게 승지의 길을 막으며 이승지에게 하
는 말이 "아따! 근군(近君)하는 시종신(侍從臣)이라 자세가 대단하구려.
해가 아직 늦지 아니했는데, 담배 한대 피우고 갈 여가도 없단 말이오"
한다.
이승지는 이 노인의 책망 비슷한 말투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그
집으로 따라 들어가, 저간을 살펴보니 먼지가 가득한 한간 방이나 윗
목에는 서책이 가득하였다. 주인은 다시 승지에게 읍하고 아랫목에
놓인 초방석(草方席)으로 인도하니 승지는 그의 말대로 그 방석에 앉
았다. 그 다음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앉았다가 안문으로 향하여 "손님
이 오셨으니 술상을 내오너라" 고 한다.
잠시 후, 헌 누더기로 간신히 앞을 가린 여자하인이 걸죽한 막걸리 한
뚝배기와 프르둥둥한 서산 상사발 하나와 김치 한 보시기를 모 떨어진
소반에다 얹어 내다놓으며 손님을 기웃기웃 쳐다보고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그 상을 손님 앞에 놓고 뚝배기에서 상사발에다 막걸리를 따
르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이승지는 당초부터 주인이 하는 짓이 이상하여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마음이 불안한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인데, 그 막걸리 따르는 것을
보고 속마음으로 크게 놀래어 불안하였다.
'저 막걸리를 먹으라고 하면 어찌한다' 하고 주인의 거동만 주시하고
있었다. 술을 따라 놓고도 말이 없던 주인은 혼잣말로 "귀한 손님이
이러한 막걸리를 자실 수야 있나 내나 마시지." 하고는 훌쩍 들어 마
시고는 김치 국을 조금 마신 뒤에 다시 한 사발을 더 부어 놓더니
"이것은 내 차례니 손님의 말 기다릴 것 있나?" 하고는 또 훌쩍 들어
마신다. 그리고 나서는 안문으로 향하여 "술상 내어가거라" 한다.
승지가 살펴보니 뚝배기 술이 원래 두 사발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여자하인이 와서 상을 치운 뒤에 주인은 승지에게 다시 읍하고
"영감 대단히 미안하오. 오늘 영감이 내 술 낚시에 걸렸소. 바쁘실
텐데 어서 가십시오." 한다.
이승지가 답례를 하며 "도대체 노인은 누구이시며 술 낚시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오." 하고 물었다.
승지의 물음에 대하여 주인은 껄껄 한바탕 웃고 나서
"술 낚시꾼 성명은 알아 무엇하겠소. 내 집이 가난하고 내가 술을 좋
아하므로 가속이 간신히 반주 한잔씩은 준비하여 주나 다시는 아니
주고 손님이 오셨다면 손님 술 대작할 한 잔을 내보내 주는구려. 오
늘도 저녁에 술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얻어먹을 방법이 없고 보니 통
정할 수 있는 친구가 혹 지나가면 들어 오라 하여 술을 낚아 낼까?
하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오늘은 아무도 못 만났기에 해는 저물어
가고 해서 초조하여지는데, 마침 영감이 지나가시니 인급계생(人急
計生)이라고 내가 영감을 내 집으로 유인하여 집에만 들어오시게 하
면 내 계획은 달성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고체면하고 인사를 청한
것이나 인사를 아니 받으셨다면 모르겠거니와 받은 이상에는 초면
친구를 괄시는 못하는 것이라 꼭 따라 오실 것이 아니오. 나는 이 방
에 손님이 있는 것만 보이면 술은 마실 수 있거든요. 아까 계집하인
이 기웃기웃한 것은 전에 내가 없는 손님을 있다 하고 술을 낚는 일
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손님 술을 내왔다가도 손님이 없으면 도
로 가져가는구려. 그래서 참말로 손님이 있나 없나 보아 없으면 도로
가져가려고 기웃거린 것이오. 오늘의 이 신기 묘산이 적중하였으니
누추한데 오래 앉아 계실 것이 없소. 어서 가시오." 하며 문 밖까지
전송을 하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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