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서 나와 다시 남여를 타고 대궐로 향하는 이승지는 방금 자기
가 당한 일이 맹랑하기도 하였거니와 그보다도 술꾼의 술 낚시질의
이용물 노릇을 한 것이 지극히 분하였다. 그 날밤 승정원에서 이승지
와 함께 번을 들은 승지 남공철이 이승지의 안색이 좋지 못함을 보고
"오늘밤에는 영감의 기색이 좋지 못하니 댁에 무슨 연고가 생겼소?"
하자.
이승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집에는 별 일 없지만 오는 길에서 괴상한
일을 당하였기 마음이 편치 못하오." 하면서 오는 길에 당한 일을 이
야기하였다. 그때에 승정원 내시가 나와 상감마마께옵서 입직한 승지
를 부른다고 한다.
승지가 명에 의하여 어전으로 입시하니 정조가 하교하되 "오늘밤은
하도 심심하기에 시종신들과 한담으로 소견할까? 하여 부른 것이다.
" 하며 옥당들의 주담(奏談)이 끝난 뒤에 두 승지를 바라보시며 "너희
들도 말을 해보아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승지가 "오늘 번들어 오는 길에 당한 일을 말하려고 했으나
비설(鄙屑)하여 못 아뢰나이다." 하니
정조는 "군신의 사이는 가인 부자와 같으니 친구에게 말하려던 것을
임금에게 어찌 말 못 할 것이냐. 본대로 당한 대로 말하라" 하신다.
이에 이승지는 오늘 입궐하러 들어오다가 북 다른 재에서 당하였던
일을 자세히 아뢰는 도중 "술을 따라 놓고도 권하지 않더라……" 는
구절까지 이르렀을 때,
정조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정도만 들어도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
가를 짐작하겠다" 고 하신다.
이승지가 그 다음 일을 다 아뢴 뒤에 "신은 그 사람이 실성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고 부언하니,
정조는 다시 웃으시며 "그 사람이 실례한 것이 아니라. 네가 몰지식
하다. 너는 문과도 하고 벼슬도 하였으나 사책에 오르지 못하되 그
사람은 지금 방달한 미친 사람 비슷하지만 사책을 빛낼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정녕코 박지원일 것이다" 하시니 이승지는 자기가 고루
하여 문봉으로 일세를 능가하는 연암선생 박지원을 못 알아 본 것
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물러 나왔다.
그 옆에 시립 하였던 남공철이 다시 부복하여 아뢰기를 "전하의 지금
하교를 듣자오니 옛말의 지신막여군(知臣莫如君)이 적실한 말씀이외
다. 성명지치(聖明之治)에 아래에 그런 사람이 봉초(蓬草)에 매몰되면
옥의 티같이 성루가 될까 합니다. 이미 통촉하셨으니 유현(遺賢)의 탄
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하였다.
정조가 남승지에게 이르기를 "내가 유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지
원의 문장이 섬부(贍富)는 하나 정도로 아니 나가고 권도로 나가므로,
그 버릇을 징계하려고 모른 체하였으나, 그 정도로 기한(飢寒)에 빠진
것을 몰랐다." 하시고, 즉시 박연암을 불러 초임을 시키시고, 일년 이
내에 안의(安義) 현감을 제수 하셨다.
박연암은 소년시절에 경제문제에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
대가 허용을 아니하니 다시 문장변으로 들어가서 400년여를 내려오
던 고문사체를 개혁하려 하니 박제가, 이덕무, 김매순 등이 다들 그
의 문도라, 이고증(泥古症)에 걸린 당시 문사들이 연암을 이단이라
고까지 지목하고 정조에게 박지원은 세상을 버려놓은 사람이라고
아뢰어 정조도 연암을 미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연암은 자기의 초지를 그대로 굳게 지키어 흔들리지 아니하
였으며, 그 부인도 남편이 세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 본뜻을 지키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라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바느질품도 팔고 갖은 고
초를 당하여 가며 밤에 글 읽을 때 쓸 초와 좋아하는 술은 조금씩 이어
주되 술의 거성인 연암을 만족하게까지 할 재력은 없으므로 매일 한
두 잔 정도의 술도 그 부인이 진심 갈력으로 대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 생각이 나기만 하면 연암은 가끔 그러한 행동을 하였던 것
이며, 그 날은 공교롭게도 입직할 승지에게 걸리어 큰 출세는 못하였
어도 그토록 좋아하는 술의 해갈만은 면할 수 있는 길이 정조에 의하
여 마련된 것이었다.
[오백년기담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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