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언제부터...

eorks 2018. 9. 2. 00:03

풍수지리(風水地理)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언제부터...
1.원시적 역사
풍수지리학의 기원(起源)은 오랜 옛날 인류가 존재(存在)하기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삶을 영위하데 있어서 근본적(根本的)으로 먹고, 입고, 잠을 자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한 필수적인 것을 충족(充足)하기 위하여 옛날부터 사람들은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하고 마시기에 합당한 물을 찾으며 햇빛이 잘비치는 양지바른 곳에 집터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한데서 풍수지리의 이치는 자연스럽게 발생(發生)하게 되었다.
홍수와 가뭄에도 피해가 덜한 지역(地域)을 원하며 살아가기에 편리(便利)한 곳을 찾아 나선 것이 풍수지리의 원시적(原始的) 모습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동서양(東西洋) 어느 곳에서든 마찬가지 현상(現象)이었겠지만 풍수지리가 우리나라에서 깊이 있게 발달(發達)된 이유는 이 땅이 어느 나라보다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四季節)이 뚜렷하고 산(山)과 물(水)의 흐름이 아름답고 힘이 있으며 풍수지리의 원리를 적용하기에 매우 적합(適合)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훌륭한 땅의 기운과 좋은 물이 대대로 삶을 영위해 가는 우리 민족에게 농경문화의 환경을 마련해 주니 더욱 풍수지리의 원리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해 나간 것이 풍수지리학의 원시적 역사라 하겠다.

2.학문적 역사
땅을 비롯한 모든 물체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근본이 되는 기(氣)의 사상은 우리 나라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일찍이 발달되었고 풍수지리의 사상은 높은 경지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풍수지리학은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의 고유한 풍수지리 사상은 중국 풍수지리학의 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것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오히려 우리에게 역수입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신라 말기에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의 풍수지리학이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중국의 고대(古代)인 주(周)나라에 이미 묘지를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으며 그 후에 풍수지리 사상은 B. C 3세기경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학문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3세기경에는 풍수지리설 중에 최고(最高)의 고전(古典)이라 할 수 있는 청오경(靑烏經)이 한대(漢代) 청오자(靑烏子)에 의해 저술되었으며 4세기경에는 동진(東晋)의 괵박에 의하여 장경(일명:금낭경)이 나오게 된다.
이 책들은 지금까지도 풍수지리학계의 최고(最古)의 경전(經典)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의 풍수지리 사상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기에 우리 풍수지리학의 전설적 원조라 할 수 있는 도선 국사(道詵國師:827∼898)에 의해서이다

옥룡자(玉龍子)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도선 국사는 선종(禪宗)계통의 승려로서 "풍수지리설은 세상과 인간을 구제하는 법"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불교와 더불어 널리 가르침을 주었다.
그 후에 풍수지리학은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를 지나오면서 학문적으로 그 위치를 굳히고 오늘날의 국가고시에 해당하는 과거(科擧)의 시험과목으로까지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태조(이성계)가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정(定)할 때 한양의 주산(主山)문제로 인하여 공식적인 국가의 대회의(大會議)가 어전(御前)에서 열리는 등 왕조(王朝)의 큰 문제와 개인의 흥망 성쇠까지를 다루게 되니 그 시대의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이렇듯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잡았던 풍수지리학은 조선시대 말기에 접어들어 그 내용과 이론이 난해하게 되면서 일반 서민들은 이 학문을 이해하기조차 어렵게 되며 한문(漢文)과 주역(周易)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풍수지리의 학문을 접할 수 없고 마치 일부 계층의 전유물(專有物)처럼 되어 갔다.
풍수지리학의 근본사상이 널리 서민(庶民)들에게도 전파되어 복(福)되고 건강한 사회를 건강한 사회를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을 전수 할 때는 마치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은밀하게 전해졌던 것이다.
소위 천기누설(天氣漏泄)하지 말라는 식으로 일부의 고위층 또는 식자층에게만 전용(全用)되어 왔던 점도 크나 큰 문제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태에서 조선시대는 일본의 침략으로 막을 내리고 비운의 일제(日帝)통치시대가 다가오니 이 학문도 풍수전쟁을 치르며 숨을 거두기 직전에 놓이게 된다.

일제의 통치시대를 거치면서 그들은 철저한 계획과 끈질김 속에서 우리 나라의 기운을 꺾기 위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한산과 백운대, 인수봉 등의 주변 곳곳에 수많은 쇠말뚝을 박으며 우리 민족의 목까지 조이려고 했던 시절이었다.
그 후 1945년 일제의 통치는 끝이 나고 해방이 되어 풍수지리의 학문도 제 위치를 찾는 듯하였으나 곧이어 밀려드는 서양의 물결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학문으로서의 제자리를 또 다시 잃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전통 학문적 위치에서 미신화되어 가는 어려운 위치로 몰리며 서양적 사상 속에서 문화의 사생아로 전락되어 버리는 상태까지 놓이게 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뜻있는 몇몇의 훌륭한 분들에 의하여 다시 그 숨결과 참다운 진리(眞理)의 불꽃이 살아나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풍수지리학은 이제는 천기누설(天氣漏泄)을 운운(云云)하며 일부 계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질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생활 속에서 자리를 잡고 건전하고 복된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건축(주택) 공학의 기본이 되어야 하고 자연과학의 토대가 되면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지리학으로서 학문적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