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복합유산

세계복합유산 /영국 /세인트 킬다 군도(10)

eorks 2019. 6. 10. 00:15

세계복합유산 /영국 /세인트 킬다 군도
[St Kilda]
요약 : 헤브리디스(Hebrides) 제도 연안에 있는 세인트 킬다 군도(St Kilda)는 히르타(Hirta) 섬, 던(Dun) 섬, 소이(Soay) 섬, 보어레이(Boreray) 섬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화산성 군도이다. 이 지역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절벽들이 몇 개 있는데, 퍼핀(puffin) 속(屬) 새와 부비새(gannet) 등 희귀종과 위기종(Endangered, EN) 조류가 이곳에 커다란 군집을 이루며 서식하고 있다.

세인트 킬다 군도에는 1930년부터 사람이 거주하지 않게 되었지만, 인간이 만든 건축물, 경작 체제, 클레이트(cleit), 전통적인 고원의 돌집 등 헤브리디스 제도 특유의 극심한 환경에서 2,000년 이상 인간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취약한 상태에 있는 이러한 유물들은 새, 농작물, 양 등에서 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기반한 자급자족형 경제의 특성을 보여 준다.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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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세인트 킬다 군도

    국가 :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좌표 : N57 49 2,W8 34 36

    등재연도 : 1986년(2004년, 2005년 확장)

본문 :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세인트 킬다 군도에는 중요한 동식물 서식지들이 있으며, 복잡하고 다양한 생태 구역들이 공존하는 좁은 지역에 새들이 높은 밀도로 서식하고 있다. 아울러 3곳의 해양 구역에서는 복잡한 생태적 역학이 작동하면서 이곳의 해양과 육지의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세인트 킬다의 문화적 경관은 새, 농작물, 양 등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기반으로 한 생계형 경제 체제에서의 탁월한 토지 사용과 오랜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이 지은 구조물, 경작지 체제, 돌로 만든 저장소, 고원의 전통적인 돌집 등은 인간이 이 머나먼 땅의 극심한 상황 속에서 2,000년 이상 살아왔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영국 제도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아우터헤브리디스(Outer Hebrides) 제도에 있는 세인트 킬다 군도는 제3기 환상(環狀) 화산(ring volcano)의 흔적으로, 풍화와 빙하 작용으로 인해 멋지고 가파른 절벽이 형성된 곳이다. 보어레이 섬 근처에는 영국에서 가장 높은 스택(바위섬)인 ‘스택 안 아민(Stac an Armin, 191m)’과 ‘스택 리(Stac Lee, 165m)’가 있다. 암석들은 주로 반려암, 문상반암, 조립현무암, 현무암 등이다.

2,000년 전부터 인간이 이곳에서 머물렀던 고고학적 증거는 주로 빌리지 베이(Village Bay)와 글린 모어(Gleann Mor)에서 청동기 시대에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이나 바이킹들이 들렀던 흔적 등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19세기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초기의 구조물과 거주용 건물들이 대부분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었다. 1826년에는 2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단순한 직사각형 구조의 교회 건물이 세워졌는데, 1898년~1900년에 교실 하나가 북서쪽에 증축되었다. 선교단, 천연두의 발병, 관광 등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1930년에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세인트 킬다는 현재 무인 지대가 되었다.

세인트 킬다 군도의 일반적인 전통 건물 형태는 클레이트(돌을 쌓아 만든 작은 건물)로, 히르타 섬 전체에 1,260개, 외딴 섬과 스택에 170개 이상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클레이트는 끝이 둥근 직선 형태로 되어 있으며, 벽은 돌을 쌓아 만들어졌고, 지붕은 흙과 풀을 덮은 석판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기본 형태이지만, 문의 위치는 각 클레이트에 따라 매우 다양하며 별도의 방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클레이트는 대개 물품을 보관하는 데 쓰였으며, 환기가 잘되도록 하기 위해 벽이 개방형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새, 알, 깃털, 수확된 작물, 연료로 쓰이는 토탄이나 풀이 이곳에 보관되었다.

보호를 받고 있는 세인트 킬다 군도의 인간 정착지는 다음과 같다.
• 빌리지 베이와 히르타 호(Loch Hirta)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 히르타 섬 남쪽에 있으며, 가장 규모가 큰 정착지이다.
• 섬 북쪽의 글렌 베이(Glen Bay)와 아’글린 호(Loch a' Ghlinne) 근처에 있는 글린 모어 취락지.
• 글린 모어 북서쪽의 지오크루바이드(Geo Chrubaidh) 취락지.
• 서쪽 해안에 있는 작은 유적인 클레이진 언 타이 페어(Claigeann an Tigh Faire).

역사적 배경 :
‘킬다’라는 이름의 성인이 없기에 세인트 킬다 군도가 어떻게 이름 지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물 위에 떠 있는 섬들이 방패 모양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방패’라는 뜻을 가진 아이슬란드 고어인 ‘스킬다르(skildar)’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히르타는 2,000년 이상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아온 곳이었으며, 바이킹들이 이곳에 들렀거나 살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군도의 지명들은 스칸디나비아 어와 게일 어의 영향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세인트 킬다 군도에서의 삶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서술은 1697년에 이곳을 방문했던 마틴 마틴(Martin Martin)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이곳은 해리스와 던베건(Harris and Dunvegan) 성의 매클라우드(MacLeod) 가의 소유였으며, 이 가문의 일부는 1930년에 주민들이 외지로 이송되기 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마틴이 방문했던 당시에 약 180명의 사람들이 히르타 섬(Hirta)에 살고 있었으며, 주요한 정착지는 빌리지 베이에 있었다. 그들은 양과 다른 가축을 기르거나 농작물을 재배하기도 했지만, 주요한 생산물은 바닷새와 그들의 알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민들은 절벽 밑에서 위로 기어 올라가거나, 절벽 꼭대기에서 새의 둥지가 있는 아래쪽으로 몸을 늘어뜨림으로써 새를 잡았다. 그들은 새를 통해 얻은 기름과 깃털을 임차료 대신 지불했다.

1822년에 ‘북쪽의 사도(Apostle of the North)’로 알려진 유명한 전도 목사 존 맥도널드(John MacDonald) 목사가 세인트 킬다 군도를 찾았다. 그는 청교도의 기반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1830년에 이곳에 상주 목사로 온 닐 매켄지(Neil MacKenzie)가 그 기반 위에 청교도 체제를 확립했다. 닐 매켄지는 세인트 킬다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런데일(run-rig, RUNDALE)’ 체제라는 전통적인 경작 방식을 각 가구마다 땅을 영구적으로 할당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빌리지 베이에서는 옛 마을의 주택들이 철거되고, 열을 이룬 검은 돌집들로 교체되었다. 1861년에 매클라우드가 비용을 대면서 던베건에서 데려온 석공들이 새로운 오두막들을 지었으며, 이러한 오두막들은 검은 돌집들과 나란히 세워져 주로 외양간으로 유지되었다.

1865년에는 존 매케이(John Mackay) 목사가 세인트 킬다 군도에 파견되어 섬의 주민들에게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엄격한 신앙의 원칙들이 적용되면서 주민들은 당시 섬의 전통 음악과 시(詩)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세인트 킬다의 역사에서 질병은 중요한 요소였다. 1724년에 발병한 천연두로 주민의 대부분이 사망했으며, 이후 인구는 110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전통 경제 또한 쇠퇴하게 되었다.

1870년대부터 관광객들이 빌리지 베이를 찾기 시작했다. 외부의 돈이 유입되자 세인트 킬다 군도의 주민들은 관광객들로부터 얻는 수입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광 수입은 불확실했으며, 20세기 초에는 이러한 수입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1899년에 우체국이 설치되었지만 영국 본토와의 통신은 어려웠다.

제1차 세계대전 끝 무렵인 1918년~1919년에는 이곳에 주둔한 해군 부대를 통해 라디오 통신, 정기 우편, 일, 보급품 등이 들어왔다. 1918년에는 통신탑, 저장소, 그리고 다른 건물들을 파괴한 독일 유보트(U-boat)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총과 탄약을 위한 저장고가 증축되었다. 군도의 인구는 1928년경에 37명으로 감소했다. 남은 주민들은 이주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해 승인을 받아 1930년 8월 29일에 그들은 군도를 떠났으며, 대다수는 본토 삼림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1931년에 매클라우드 가는 세인트 킬다 군도를 덤프리스(Dumfries) 백작(후에 5대 뷰트(Bute) 후작이 됨)에게 매각했다. 백작은 1956년 사망할 때까지 이 유산을 새들이 서식하는 무인 지대로 관리했다. 군도는 1957년 1월에 스코틀랜드 문화보호협회에 귀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인트 킬다 군도 [St Kilda]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白頭大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