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모리셔스 /아프라바시 가트(568)

eorks 2021. 1. 1. 09:08

세계문화유산 /모리셔스 /아프라바시 가트
[Aapravasi Ghat]
요약 : 포트루이스(Port Louis) 지역에 있으며 현재 총 1,640㎡에 이르는 이 지역은 현대판 노예 노동 계약이 시작된 곳이다. 1834년 영국 정부는 모리셔스 섬을 노예 노동력을 대체할 새로운 ‘자유’ 노동력을 구하기 위한 ‘거대한 실험장’으로 삼았다. 1834년〜1920년 사이 인도에서 거의 50만 명에 달하는 근대 계약 노동자들이 아프라바시 가트로 이주했다. 이 인도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으며 서인도제도(카리브 해 지역)나 아프리카 동남부나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보내지기도 했다. 아프라바시 가트의 건물은 역사상 가장 큰 집단 이주의 흔적을 간직한 채 최초로 세계 경제 체제로 편입되는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아프라바시 가트

아프라바시 가트

아프라바시 가트

아프라바시 가트

    국가 : 모리셔스(Mauritius)
    위치 : 포트루이스 지역(Port Louis District)
    좌표 : S20 9 31.1,E57 30 11.4
    등재연도 : 2006년
    아프라바시 가트 :
    1721년 프랑스는 모리셔스를 공식적으로 선점하고 프랑스인은 트루 판파롱(Trou Fanfaron)을 정착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장소로 삼았다. 1732년, 프랑스 이주자들은 인도, 아프리카 그리고 마다가스카르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포트루이스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큰 방어벽을 친 마당 주변에는 정사각형 벽으로 된 병원의 잔해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초기 건축물의 일부이다. 병원은 현재 완충지역에 속해 있다. 트루 판파롱의 내륙지역은 포트루이스의 국제 상업 중심 도시가 되었다. 18세기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이곳에 정착했고, 19세기에는 중국과 인도에서 건너온 상인들과 무역을 하였다.

    라임 모르타르와 라타니아 나무로 만든 석벽과 라타니아 잎에 모르타르(argamasse mortar)를 얹은 널 지붕을 만드는 건축 기술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모리셔스’식 건축 양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기술은 인도에서 유입되었다. 당시에 요구르트, 달걀흰자 그리고 버터와 참기름을 이용한 요리법이 들어왔는데 이 요리법은 지금도 이용되고 있으며 아프라바시 가트 복원에 요긴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18세기 중기부터는 계약 노예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사탕수수 농장이 발달하였다.

    19세기 초, 영국이 대서양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1810년 말 결국 포트루이스로 진군하여 프랑스 군을 항복시켰다. 이후 영국이 포트루이스 지역의 설탕 생산량을 늘리고 포트루이스를 자유 무역항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도로가 건설되는 등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1834년, 노예 제도가 폐지되자, 영국 정부는 고용 계약 제도를 이용해 노동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특히 설탕 공장을 위한 노동력을 유지하려고 이 제도를 채택하였다. 이후 인도에서 해마다 수천 명이 이주하여 포트루이스의 대규모 창고에서 집단 생활을 하며 살았다. 이 대규모 창고가 있던 유적을 아프라바시 가트라고 한다.

    아프라바시 가트는 트루 판파롱의 동쪽 만에 있다. 이 대규모 이주노동자의 거주 창고는 3단계로 변화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1834년~1849년에 노동 고용 계약 제도가 처음 시작된 때다. 처음에는 이주 노동자를 수용할 공간이 없어서 항만 주변의 여러 건물에 이주민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했다. 1840년경에는 이전에 천연두 병원으로 개조했던 건물을 이주민 수용 창고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 건물의 자리는 알 수 없다. 1843년 기록으로 미루어 봤을 때 ‘옛날 석조 건물’이라는 곳이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이 건물은 1740년경에 지어진 군인 병원 단지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 밖에도 세 건물이 더 사용된 것으로 전한다.

    아프라바시 가트 지역은 1849년에 거주지로 선정되었다. 그 지역에 남은 옛 프랑스 건물은 1174년 전에 지은 것이며,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다른 건축물이 추가로 건축되었다. 이는 1849년에 작성된 이 지역에 대한 설계도 초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건물만으로는 건물이 당초의 건설 계획대로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 도면에는 앞마당 주변에 건물이 여섯 채 있고, 전체 단지 옆으로는 항구로 내려가는 석조 계단이 있다.

    그러나 새로 건설된 건물만으로 새로 입국하는 많은 이주자를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남자, 여자, 어린이 모두 합해 1,000명이 창고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결국 1850년에 이르러 건물을 증축하게 되었고 새로운 상륙 지점도 조성하였다. 1856년에는 추가 확장공사를 인가했으며 1857년까지 대부분의 지역에 수용 시설을 짓게 되었다. 이 수용시설은 토지를 추가 매입하고 옥외 화장실을 설치하고 양철 지붕보다는 프랑스 타일로 건물 지붕을 씌우고 단열과 환기시설도 개선하였다. 또 해안을 따라 선착장을 지어 지역 환경을 개선하였다. 이러한 시설 확충이나 개선은 1859년에 거의 마무리되었다.

    1859년, 노동자들의 보호자는 보고서에 이 지역에 관한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아스팔트 바닥에 양철 지붕과 널빤지 벽으로 된 큰 건물들이 있었으며 이 건물은 ‘불편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상태’였고 6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59년에 개선된 대형 창고는 사진 기록으로 전해진다. 1860년대에는 신구 이주 노동자를 나누었고 이들에게 각각 화장실과 목욕시설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건물의 개선은 1864년〜186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864년, 철도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이주 노동자 대형 창고가 두 개로 줄었고 트랙의 끝을 따라 벽을 쌓았다. 이후 1923년까지 사소한 변경 사항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노동계약 이주자들의 수가 줄어들었고 1870년대로 이후 1923년에는 이주자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프라바시 가트 [Aapravasi Ghat]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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