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크로아티아 /스타리 그라드 평야(599)

eorks 2021. 2. 1. 14:21

세계문화유산 /크로아티아 /스타리 그라드 평야
[Stari Grad Plain]
요약 : 스타리 그라드 평야(Stari Grad Plain)는 아드리아 해(Adriatic island)의 흐바르(Hvar) 섬에 있는 문화 경관이다. 기원전 4세기에 파로스(Paros) 섬에서 온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이 처음으로 식민지를 만든 뒤, 그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해 왔다. 이곳의 비옥한 평야에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포도와 올리브를 주로 하는 농업이 이뤄지고 있다. 자연보호 지역인 이곳에는 고대 석담과 건물 골조, 돌로 만든 작은 대피소 등이 남아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토지 구획 체계인 ‘코라(chora)’의 흔적이 24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스타리 그라드 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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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크로아티아(Croatia)
    위치 : 스플리트(Split), 달마티아 주(Dalmatia Counties)
    좌표 : N43 10 54,E16 38 19
    등재연도 : 2008년
    스타리 그라드 평야 :
    오늘날 성 요한 교회(Church of St. John)가 있는 장소에는 기원전 5세기~6세기경 철기시대 일리리아(Illyrian) 민족의 작은 부족 공동체가 있었다. 그리스 유적의 고고학적 자취인 스타리 그라드가 그 직접적인 증거이다. 이 평야 주변에 남은 요새와 봉분의 흔적은 그 시기의 것이거나, 그보다 훨씬 이전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가 아드리아 해까지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시라쿠사(Siracusa)의 독재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 때부터이다. 첫 번째 식민지는 기원전 384년 일리리아인의 도움으로 비스(Vis) 섬을 정복하면서 세웠다. 10년 뒤에는 디오니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에게 해의 파로스 섬 거주민들이 흐바르 섬을 정복했다. 그들은 흐바르 섬에 파로스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당시 도시의 주변은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성 요한 교회 옆에 남아 있고, 탑이 있던 성문의 흔적도 그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발굴을 통해 그리스 도시의 구획도와 주택의 흔적을 찾았다. 농업적 식민지화는 요새 도시 건설과 함께 진행되었다. 농지의 구획은 코라를 기반으로 하는데, 규칙적인 직사각형 형태로 세부적으로 나누었다. 평야의 면적은 약 16㏊에 달하며, 사각형 모양의 75개 주요 구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구획과 부지 사이에는 돌로 된 경계 표시를 세웠다. 이 일대에서 진행된 몇 차례의 발굴 작업으로 평야에서 주민 일부가 거주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평야 지대의 방어 체계는 이전부터 있던 일리리아 요새를 재사용하고, 여기에 새로운 요새를 더하여 구축했다. 당시 요새 가운데 4개의 자취가 남아 있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 시라쿠사 제국의 몰락으로 파로스는 그리스화한 일리리아인의 독립 공국이 되었다. 이 시기의 번영으로 도시는 흐바르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왕의 수도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220년에 이 지역으로 권력을 확장했지만, 로마와 갈등 관계에 있다가 기원전 219년에 도시가 부분적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세워진 그리스의 비문을 보면, 파로스의 다른 도시들의 도움으로 곧 재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흐바르 섬은 로마의 정복에 오랫동안 저항하지 못했다. 섬의 항구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본토의 달마티아와 일리리아를 향한 로마 원정대의 해군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는 파리아(Pharia, Faria)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통치 기간에는 자치도시(municipium)의 지위를 획득했다. 섬 전체가 로마인들에 의해 식민지화된 것이다.

    섬에 남은 고고학적 흔적은 당시의 경제 활동이 포도 생산과 어업, 항구 부근의 상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평야에는 몇몇 로마식 무덤이 만들어지고, 물탱크가 축조되기도 했다. 고대 후반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파리아는 그리스 시대와 비교했을 때 좀 더 작은 경계로 다시 요새화되었다. 기독교의 첫 흔적은 5세기~6세기 무렵의 것으로, 묘와 침례실, 모자이크 등을 통해 나타난다.

    중세 시대 흐바르와 파리아의 역사는 복잡하다. 12세기에는 기독교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었고, 13세기 중반부터는 베네치아인들에 정복당해 1797년까지 정치적인 통제를 당했다. 이 긴 세월 동안에 스타리 그라드 평야에 대한 통제권은 기독교 교회와 중세 귀족들이 공유하거나 분할해서 행사했던 것이다. 그 사이 작은 교회들이 평야에 세워졌는데, 평야와 이곳에서의 농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세기,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식 토지 구획의 경계에 세워진 벽을 확인하고 명확한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이 도시는 베네치아의 경제개발 궤도 안에서 15세기부터 교역 중심지 항구로서의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당시의 지역명은 캄포 산 스테파니(Campo San Stephani)였다.

    19세기에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평야에 관개 공사를 하고 토지대장 체계도 확립했다. 19세기 말에는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만드는 필록세라(phylloxera) 병이 돌면서 와인 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농지를 포기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아예 지역을 떠나는 인구가 늘었다. 남부에서 포도를 경작하던 마을들이 부분적으로 사라지고, 토지와 도로 대장 체계도 관리 부족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BR>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코라는 새로운 위협에 맞닥뜨렸다. 집단농장과 농업의 기계화가 원인인데, 이 시기에 인구의 상당수가 코라를 떠났다. 20세기 말에 포도와 올리브 경작을 위해 다시 돌아온 주민이 많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현대화된 장비 사용은 지역의 원래 모습을 보존하는 데 위협이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타리 그라드 평야 [Stari Grad Plain]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