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카보베르데 공화국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610)

eorks 2021. 2. 12. 08:59

세계문화유산 /카보베르데 공화국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Cidade Velha, Historic Centre of Ribeira Grande]
요약 : 적도 지역에 건설된 최초의 유럽의 식민지 건설 기지로,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상티아구(São Tiago, Santiago) 섬 남쪽에 있다. 이 도시는 18세기 말에 ‘큰 강’이라는 뜻의 ‘히베이라 그란드(Ribeira Grande)’에서 ‘오래된 도시’라는 뜻의 ‘시다데 벨라(Cidade Velha)’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식민 시대 당시의 거리와 교회 2개, 요새, 16세기의 화려한 대리석 기둥이 있는 필로리(Pillory) 광장 등 인상적인 유적이 남아 있다.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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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국가 : 카보베르데 공화국(Cape Verde)
    좌표 : N14 54 54.5,W23 36 18.7
    등재연도 : 2009년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
    아프리카 서쪽 해안에서 1460년경에 발견된 상티아구 섬은 포르투갈 왕실령의 무인도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군도의 섬들을 탐사한 후 새로운 기항지를 정하였고 이것이 ‘히베이라 그란드’의 탄생한 과정이다. 1466년 초에 왕이 특허장을 발부하면서 주민들은 노예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해안을 드나드는 기항지였으나 나중에는 희망봉에 이르는 기항지로 발돋움하여 포르투갈 해상 무역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최초의 방어 시설, 시청, 그리고 이 섬의 최초의 교회가 15세기 말에 건설되었다.

    히베이라 그란드는 대서양 횡단 삼각 무역을 꾸리기에 이상적인 곳이었고, 적당히 외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특히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안성맞춤이었다. 포르투갈은 1494년에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에 따라 노예무역을 독점했으며, 이곳에서 발견된 필로리 기념물은 노예체제에 근거해 폭력을 휘둘렀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16세기에 도시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빠르게 성장했다. 해양상의 특별한 위상과 대륙을 잇는 지리적 조건, 북대서양 아조레스(Azores) 제도 부근을 돌면서 흐르는 아조레스 조류 덕분이었다. 히베이라 그란드는 유럽 최초의 성공적인 공해(公海) 항해를 실현한 곳으로, 섬은 세계화된 포르투갈 무역의 주요 교차로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함대가 유럽은 물론 기니, 인도양, 인도, 샴(타이의 옛 이름), 브라질, 서인도 제도의 앤틸리스(Antilles) 제도를 오갔으며, 여러 가지 상품과 식물, 인간, 정보를 교환했다.

    히베이라 그란드는 왕의 도시의 지위를 획득했고, 1533년에 카보베르데(Cape Verde)와 아프리카 해안에서 최초의 주교 교구가 되었다. 그에 따라 아프리카 사람들 간의 다양한 접촉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노예와 자유 유럽인이 접촉하는 ‘이동과 교환’의 장소가 되었다. 노예는 유럽 문화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고, 노예에게는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이주되기 전에 그리스도교를 전도하였다.

    좁은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카보베르데는 농업경제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 되었다. 많은 식물 종이 들어와 새로운 기후·토양 등 환경에 적응을 실험하는 중심지가 된 것이다. 특히 16세기~17세기에 이 섬은 실험적 정원이자 온 대륙의 식물과 종자의 보관소가 되었고, 식물과 종자는 이를 요구하는 다른 나라로 수출되었다. 온대와 열대 사이의 중간 지역이어서 건조하지만 상대적으로 덥고 무역풍이 부는 기후 덕분에 이곳은 아주 다양한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재배 식물로는 사탕수수, 바나나, 동아프리카 코코넛, 아메리카 옥수수, 감귤류, 유럽산 무화과, 목화 등이 있다.

    도시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한 세기 반 동안 주요 기항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노예시장으로서도 비중 높은 역할을 수행했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섬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많은 뱃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그 때문에 요새와 성벽을 갖춘 복합 방어 시설을 지어 섬을 보호하고자 했다. 1585년에는 영국의 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경이 이 섬을 약탈했다. 이런 이유로 섬의 방어 체제는 1593년 당시 가장 강력했던 상펠리페(São Felipe) 왕립 요새를 완성하여 더욱 강화하였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새로운 해상 열강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름 잡고 있는 해상 무역 주도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자크 카사르(Jacques Cassard)는 프랑스 낭트 출신의 해적으로, 1712년에 루이 14세의 이름을 앞세우고 히베이라 그란드를 공격해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당시에 상티아구 섬은 더 이상 과거처럼 부유하고 강력한 해양 거점이 아니었다. 도시는 18세기에 급격히 쇠퇴되면서 지배층이 도시를 떠나자, 프라이아(Praia)가 새로운 무역 기항지로 발돋움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는 정치와 행정의 주요 기능이 프라이아로 이전되었다.

    프라이아의 새 도시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건축 자재가 부족했다. 프라이아와 히베이라 그란드는 인접해 있었으므로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히베이라 그란드의 좋은 건물을 파괴하여 건축자재를 가져가게 되었다. 새 도시가 건설되면서 이때 상대적으로 오래되었다는 뜻으로 히베이라 그란드는 ‘시다데 벨라’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히베이라 그란드에는 19세기까지 포르투갈 식민 도시의 일부 거주지가 남아 있으며, 20세기 후반에는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섬은 카보베르데 특유의 전통 가옥들이 남아 있어 지역적으로 중요하다.

    최초의 도시 복원 운동은 196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왕립 요새, 노사 세노라 두 로자리오(Nossa Senhora do Rosário) 교회, 필로리 기념비가 복원 대상이었다. 1992년에 국제기념물유적협회가 복원 운동의 과학적 수준을 평가했다. 1970년대에 정부 여당이 문화유산을 평가하고 유산의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시다데 벨라를 다시 점검했으며, 1978년에 최초로 유네스코 위원단이 그 지역을 시찰했다. 그러나 인적, 재정적 자원의 부족하여 복원 작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제2차 유적 정리와 복원 계획이 1999년~2003년에 실행되었다. 이 계획은 국제 협력 덕분에 전 도시에서 계속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다데 벨라(히베이라 그란드) 역사 지구 [Cidade Velha, Historic Centre of Ribeira Grande]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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