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부르키나파소 /로로페니 유적
[Ruins of Loropéni]
요약 : 코트디부아르, 가나와 접경지대에 위치한 부르키나파소 남부 소도시 로로페니에 있는 주거지 유적지이다. 유적의 범위는 넓이 11,130㎡이며, 높이 6m에 달하는 장대한 외벽, 그리고 칸막이 역할을 한 내벽, 유적 안의 건조물 흔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부르키나파소에서 가장 먼저 등재되었던 인상적인 바위 돌담은 로비(Lobi) 족 지역의 10개의 요새들 중에 가장 잘 보존되었다. 이 돌담은 황금 무역 세력의 사하라 종단 무역이 융성하던 당시의 모습을 증명하는 100개 돌담 도시의 일부분이다.
이 유적은 최소 1,000년 전에 아마도 로론(Lohron) 인 혹은 쿨랑고(Koulango) 인에 의해 건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론 혹은 쿨랑고 인은 금 추출과 가공을 통제하던 사람으로, 14~17세기에 이곳을 점령하였다. 유적군은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있었던 탓에 19세기 초에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직도 많은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으므로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이곳은 앞으로 많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로로페니 유적
국가 :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
좌표 : N10 15 0,W3 34 60
등재연도 : 2009년
로로페니 유적 :
여러 학문 분야의 최근 연구는 로로페니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구는 17세기부터 적어도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 평가 보고서에서 언급했던 간족(Gan)에 대한 연구는 그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실제로 20세기 초 이래로 유적에 관한 많은 보고가 발표되었지만, 구전과 다른 문서 기록들의 정보를 지지하기 위한 고고학적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 목표 지향적으로 이루어지는 발굴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는 바람직한 행위이다.
사하라 사막 이남에 자리 잡은 여러 왕국의 지정학적 배경 속에서 로로페니 유적의 건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가나·말리·송가이 등 최초의 여러 제국들이 멸망한 뒤, 그러니까 금광업자와 금 세공인들이 로비(Lobi) 지역으로 몰려들었을 때, 그리고 강력한 아샨티(Ashanti) 왕국 등과 같은 아칸(Akan)의 여러 왕국들이 남쪽으로 발전하여 사람들이 노예 사냥꾼을 피해 북쪽으로 이주하기 훨씬 이전에 나타났다. 로비 지역의 주위에는 로로페니 가까운 곳의 웨리미탕나(Werimitangna) 같은 여러 금광의 자취가 남아 있다.
금을 보유하는 지역은 제네(Djénné), 몹티(Mopti), 팀북투(Timbuktu) 등과 같은 니제르 강 북부에 있는 대규모 상업 도시들까지,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북아프리카까지 대상들에 의해 연결된다. 아마도 황금이 남쪽의 대서양 해안에까지 교역이 이루어진 것은 그 후의 일일 것이다. 로비 지역은 몹티, 소르디울라소(Sore-Dioulasso), 콩(Kong) 등을 경유하는 남북 경로와 우아가두구(Ouagadougou)로부터 보로모(Boromo), 디에부구(Diébougou), 가우아(Gaoua) 등을 거쳐 봉두쿠(Bondoukou)까지 이어지는 동쪽으로부터 남서쪽으로 향하는 경로를 통해 횡단된다.
유적들은 오랜 기간 금 무역과 깊은 연관을 맺었지만 이런 증거들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넓게 지역을 성벽화한 구조물은 가치 높은 상품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남쪽 돌담의 사용 여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최근 발굴에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1902년 유적이 발견된 이후 쿨랑고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이보리코스트의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이 건축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연구는 쿨랑고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했으며, 게다가 10세기부터 콩(Kong) 지역에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로르혼(Lorhon)과 나베(Nabé) 사람들보다 앞서 등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유적을 건설했다고 하는 간족(Gan) 사람들은 아샨티 족의 압제를 피해 현재의 가나 영토를 떠났던 17세기 말부터 그들을 단지 재사용했을 뿐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황금 생산의 초점은 남쪽으로 아샨티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황금의 교역은 로비 지역 부근에서 쇠퇴했다. 황금 교역의 쇠퇴로 요새화된 건물들은 버려졌고 그뒤 간족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들렌 페르(Madeleine Père)의 사후에 출판된 저작과 모순된다.
로로페니 정착지는 간 왕조의 9대 왕이었던 토크파 파르마(Tokpã Farma)에 의해 오비레(Obiré)로부터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것을 목표로 하여 자신의 생애 마지막 무렵에 이르기까지 건설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사업은 원로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며, 그는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그 부지가 거부의 집이라는 뜻으로 ‘크포카야가(Kpôkayâga)’라고 하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 이전의 보고에서는 그 지방의 역사가·고고학자들은 그 유적이 간 족의 것이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 유적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몇몇 구전에 따르면, 사각형의 방어벽이 처음 건설되었고 다음으로 내부 부분과 마침내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벽 사이의 이음새 부분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최근의 연구와 발굴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다가 중단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팽개쳐지기도 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어떤 구역에는 (다섯 층에 이르는 뚜렷이 구분되는) 회반죽의 층이 있으며, 외벽의 모르타르는 여러 차례 수리가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발굴이 이루어진 상층부에서 발견된 것은 빈약한 증거이긴 하지만 그곳에 도굴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로로페니는 19세기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 이전에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유적에서 자라고 있는 수목들이 이 같은 시간의 척도를 확인해 준다. 최근의 연구로 많이 좋아지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 고고학 연구팀은 이 유적의 기능과 사용 등에 관한 더 나은 역사적 맥락을 밝혀내기 위해 앞으로도 고고학적 연구를 계속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로페니 유적 [Ruins of Loropéni]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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