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인도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
[The Jantar Mantar, Jaipur]
요약 : 자이푸르(Jaipur)의 잔타르 만타르는 18세기 초에 세운 천문대 유적이다. 20여 개로 구성된 주요 관측기구가 땅에 고정되어 있다. 잔타르 만타르는 대개 고유한 특성을 지닌 유명한 관측기구 가운데 대표적인 석조 건축물이다. 눈으로 천체를 관찰할 수 있게 설계한 잔타르 만타르는 건축방식과 관측기구를 재현하는 데 몇 가지 혁신을 이룩하였다. 이는 인도 역사에 길이 남을 천문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종합체이자 보존이 가장 잘된 유산이다. 잔타르 만타르는 무굴 제국 말기에 학문을 사랑한 군주가 있던 궁정에서 보유한 천문학 기술과 우주론의 개념을 잘 보여준다.
자이푸르 잔다르만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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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타르 만타르
잔타르 만타르
잔타르 만타르
잔타르 만타르
잔타르 만타르
국가 : 인도(India)
좌표 : N26 55 29,E75 49 30
등재연도 : 2010년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 :
18세기 초, 마하라자 자이싱 2세(maharadja Sawai Jai Singh II)는 약화되어 쇠퇴기에 접어든 무굴 제국의 중심에서 독립된 군주 정부를 통솔하였다. 그가 이끄는 정부는 오늘날 라자스탄 지방에 있었다. 마라타 제국과 대립하면서도 자이푸르를 화려한 수도로 조성하면서 역량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다. 건축·계획·천문학·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자이싱 2세는 식견이 뛰어난 군주였다. 그는 유럽의 영향력에 개방적이었고, 특히 중앙아시아와 이슬람에서 전수된 관찰 천문학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였다.
1720년대 말경, 새로운 수도를 만든다는 계획의 하나로 잔타르 만타르 천문대를 창건하였다. 1734년, 프랑스 예수교 소속 학자 2명이 자이푸르의 위도와 경도를 정확히 밝혀냈다. 합리적인 계획을 세워 궁정 근처와 도시 중심부에 매우 평평한 지역을 건설하고 벽으로 둘러쌌다. 1734년~1735년이 도시 건설의 절정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23명이 넘는 천문학자가 목수·조각가와 함께 건설 작업에 참여하였다. 동시에 과학 관련 활동도 시작되었다. 건설작업은 1738년까지 계속되었다.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 천문대는 아랍-이슬람, 페르시아와 서양문화에는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기구, 이를테면 대형 해시계, 각도계, 원형 단면도, 천문관측기구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재현하였다. 관측할 때 최대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였다. 여러 신기술과 적어도 대형 해시계가 설치된 브리하트 삼라트 얀트라(Brihat Samrat Yantra) 건축물, 사스탐사 얀트라(Sasthamsa Yantra)의 암흑 방들, 반구 2개가 서로 어우러진 자이 프라카시 얀트라(Jai Prakash Yantra)의 거대한 해시계, 황도대의 12궁이 축성된 라지발라야 얀트라(Rasivalaya Yantra)의 12기구체, 매우 기발한 장치인 어긋난 반구 2개짜리 카팔라 얀트라(Kapala Yantra)에서 볼 수 있는 기구와 건축물의 독창성은 자이싱 2세와 천문학자들의 공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마하라자는 천체를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예측하기 위해 천문학자 20여 명을 상시 고용하였다. 그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생성론(알렉산드리아의 천문, 지리, 수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천동설)이라는 틀에서 천체를 추적하고 그 차례를 정리한 뒤 이를 기초로 초자연적인 사건과 일식·월식을 예견함으로써, 달력과 지역 시간(라자스탄의 시간)을 계산하고 관리하면서 완성한 위치 천문학 프로그램이다.
천문대는 북을 치거나 대포를 쏘아 자이푸르 시민들에게 지역 시간을 알리는 관습을 오랫동안 지켜왔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의례는 천문대가 도시 중심부인 궁정 근처에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에 따라 천문대는 바람과 비를 예고하고 우기를 알려주었다. 천문대는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도 점성술로 미래를 예측하였다. 여기에서 거둔 성과는 최근까지 달력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천문대는 1743년에 사망한 마하라자 자이싱 2세가 능동적으로 왕권을 행사했다는 일상의 증거이다. 자이푸르 천문대는 이슬람 과학에서 나온 지이(Zij-i-Sultani, 1437년 티무르(Timurids) 왕조 울루그베그(Ulūgh Beg) 천문대에서 별 992개의 위치를 밝힌 당대 최고의 천문도)의 점성술 판을 보충하는 데 주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 성과는 인도에서 천문학을 발전시키고 힌두사회에 천문학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또 기록에 따르면 이 성과는 천문학을 합리적으로 활용하고 점성술의 중요성을 일깨웠다고 한다.
1771년 천문대를 보수하면서 여러 종류의 기구를 수리하였다. 그런데도 1800년 무렵에 천문학 관련 활동은 사라지고, 그를 활용한 대포 주조업이 부수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랑 삼라트 얀트라(Grand Samrat Yantra)가 있는 곳에는 연못을 만들고, 제철용 가마를 설치하였다. 서쪽 부지에 사원을 확장하기 위해 가치 있는 기구 2개도 파괴하였다.
마하라자 자이싱 2세 치세에 첫 번째 복원 사업을 하고 1876년에 종결하였다. 그에 따라 많은 기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라후 삼라트 얀트라(Laghu Samrat Yantra, 자이푸르 지역 시간을 20초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작은 해시계)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닥신노타라 브히티 얀트라(Dakshinottara Bhitti Yantra)는 도로를 신설하면서 이전되었다. 건축물에 제한적인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회반죽으로 된 자재를 대리석으로 교체하였고 납으로 만든 눈금은 표시 작업을 위해 제거하였다. 그런데도 마하라자가 사망하자(1880) 천문대는 또다시 방치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인 1901년~1902년 자이푸르에 주재하던 군기술자 가레트(A. H. Garret)가 보수작업을 하였다. 기구들을 완벽하게 수리하고 파손된 기구도 부분적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라지발라야 얀트라(Rasivalaya Yantra)를 구성하는 몇몇 부품이 놓였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선이나 각으로 된 공간에 약간 변화가 생기기도 하였다. 납으로 만든 눈금이 매겨진 표면을 대리석으로 교체하는 경향은 뒤이은 보수 작업(1945)에서도 계속되었다. 계단을 추가하거나 연장하였다. 자이 프락카시 얀트라(Jai Prakash Yantra)는 지하실 통로에 버팀벽을 쌓아서 튼튼하게 만들었다.
인도가 독립하자(1947) 라자스탄 정부에서 천문대를 관리하게 되었다. 천문대는 대 건축물과 고대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되었다. 이 시기에 건축물 주변을 포장하고 붉은색 안료로 도색하였다. 이 지역의 경계를 재규정하고 보호하는 한편 주변을 재정비하였다. 그 결과 관광 개발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 [The Jantar Mantar, Jaipur]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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