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四柱八字와 조선시대 반란 사건(2)

eorks 2023. 4. 27. 06:35

풍수지리(風水地理)

四柱八字와 조선시대 반란 사건(2)
정감록의 틀에 맞추어 보면 2000년인 경진(庚辰)년과 2001년인 신사(辛巳)년도 예사로운 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넷째는 조선 후기 숙종조에 오면 명리학이 보통 식자층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서자평의 명리학은 그 책을 입수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내용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워 여간한 학문을 가진 상류계층이 아니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분야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일반인들이 반란 지도자의 사주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사주가 사회 저변에 유포되어 있었음이 드러난다. 정도령의 이 사주는 다분히 조작된 사주일 가능성이 높은데, 유의할 점은 사주 조작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려고 시도하였다는 부분이다. 당취 지도부에서는 정도령의 사주팔자 자체가 엄청난 대중적 설득력을 지닌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주팔자가 반란사건과 관련해 등장하는 이유는 명리학 자체가 계급차별에 대항하는 대항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아니더라도 사주팔자만 잘 타고나면 누구나 왕이 되고 장상이 될 수 있다는 기회균등 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풍수사상도 마찬가지다. 일반 서민도 군왕지지(君王之地)에 묘를 쓰면 군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풍수의 신념체계 아닌가.

조선 후기 서북지역에서 발생한 홍경래난의 주모자들이나 동학혁명의 전봉준도 모두 사주와 풍수에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주팔자는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풍수도참설과 결합되면서 조선 후기 민란의 주요한 대중동원 메커니즘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모이는 사랑채에서는 정감록이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고,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방에서는 ‘토정비결’이 가장 인기였다는 이야기는 바로 풍수도참과 사주팔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사례다.

사주팔자의 구성 원리는 철저하게 음양오행의 우주관에 바탕 해있다. 만물은 음(陰) 아니면 양(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음과 양에서 다시 수·화·목·금·토의 오행(五行)으로 분화되고, 오행이 다시 만물을 형성한다는 설명체계다. 사람의 사주도 크게 보면 양사주(陽四柱)냐 음사주(陰四柱)냐로 분류된다. 양사주면 활발하고 음사주면 내성적이라고 본다.

음양으로만 이야기하면 너무 간단하니까 좀더 세분해 이야기하면 오행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수가 많은 사주는 정력이 좋고 술을 좋아한다든지, 화가 많은 사주는 언변이 좋고 담백하다고 보고, 목이 많은 사주는 고집이 강하고, 금이 많은 사주는 결단력이 있고 냉혹한 면이 있고, 토가 많은 사주는 신중한 대신 금전적으로 인색하다고 보는 식이다.

조선시대에는 출생 후 이름을 지을 때도 오행에 따라 지었다. 이름을 지을 때는 그 사람이 출생한 연 월 일 시를 먼저 따진 다음, 만세력(萬歲曆)을 보고 네 기둥을 뽑는다. 사주팔자를 뽑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사주팔자를 보고 불이 너무 많은 사주 같으면 뜨거움을 식히기 위해 이름을 지을 때 물 수(水)자를 집어넣는다. 사주가 너무 차갑다면, 차가움을 완화하기 위해 불 화(火)를 집어넣는다. 사주에 목이 너무 많으면 목을 쳐내야 하기 때문에 쇠금(金) 변이 들어간 글자를 이름에 집어넣는 식이다.

반대로 사주팔자에서 목이 너무 약하면 목을 보강하기 위해 나무 목(木) 변이 들어간 글자를 사용하거나, 목을 생(生)하게 해주는 수자를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불이 많은 사주팔자에는 물이 들어간 이름자를 지어주면 불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주팔자를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이름만 보고도 그 사람의 성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을 지을 때 오행의 과불급(過不及)을 고려하는 이와 같은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돈을 받고 활동하는 대부분의 작명가들이 이름을 지을 때 고려하는 제일차적인 요소는 그 사람의 사주팔자를 보고 오행의 과불급을 따지는 일이다.

족보(族譜)의 항렬(行列)을 정할 때도 오행의 원리에 따랐다. 조선시대는 대가족제도이고 대가족제도에서 위아래를 구분하는 기준이 항렬을 정해 놓고 이름을 짓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의 항렬이 나무 목(木) 변이 들어가는 식(植)자라고 하자. 아버지 항렬은 불 화(火)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영(榮)이나 영(煐)자가 그 예다.

나의 항렬은 흙 토(土)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예를 들면 규(圭)자다. 나의 다음 항렬은 쇠 금(金)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예를 들면 종(鍾)자다. 쇠 금(金) 변 다음 항렬은 물 수(水)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예를 들면 영(泳)자다. 이러한 로테이션에는 법칙이 있다. 오행의 상생 순서(相生順序)가 그것이다. 오행의 상생 순서는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이기 때문이다. 수생목에서 수는 목을 도와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수를 부모로 보고 목을 자식으로 보았다. 이하 마찬가지다.

충남 예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 임금을 배출하는 최고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민사소송 사건의 60%가 묘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다툼이었을 만큼 풍수는 우리 생활에 밀착된 사상체계였다. 산을 보는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민사소송 사건의 60%가 산송(山訟)에 관계된 사건이라고 한다. 산송(山訟)이라 함은 명당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소송사건을 일컫는다. 그만큼 풍수가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풍수에서는 산의 형태를 오행의 형태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수체(水體)의 산은 물이 흘러가는 모양이고, 화체(火體)의 산은 불꽃처럼 끝이 뾰족뾰족한 산. 예를 들면 영암의 월출산 같은 산이다. 종교인들이 기도를 하면 ‘기도발’이 받는 산이라고 한다. 목체의 산은 끝이 삼각형처럼 된 산으로 문필봉이라 불렸다. 필자가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400~500년 된 명문가의 종가집이나 묘자리를 수십 군데 답사해 보니 그 중 70%가 그 앞에 학자가 배출된다고 하는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었다. 70%는 우연이 아니고 풍수적 원리를 고려해 일부러 이런 곳을 잡은 결과다. 금체(金體)의 산은 철모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산이다. 이런 산세에서는 장군이 나온다고 한다. 토체(土體)의 산은 책상처럼 평평한 모양을 한 산이다. 제왕이 나온다는 산이다. 박대통령 할머니 묘 앞에는 토체의 산이 안산(案山)으로 포진하고 있는데, 한국의 지관들은 대부분 박대통령이 토체의 산 정기를 받았으므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날을 정할 때도 이와 같은 5가지 형태의 산의 모습을 따라 정하였다. 장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자, 조선시대 각 지역의 정보교환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예를 들어 그 지역의 주산(主山) 모양이 수(水)체일 경우에는 1일과 6일이 장날이다. 숫자 중에서 1과 6은 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만약 주산의 모양이 화체일 경우에는 2일과 7일이 장날이다. 목체일 경우에는 3일과 8일, 금체일 경우에는 4일과 9일, 토체일 경우에는 5일과 10일이 장날이다. 즉 장날을 정할 때도 원칙 없이 아무렇게나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행의 원리에 따라 질서정연 하게 배치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지역일지라도 그 부근의 주산이 금체라는 사실을 알면 장날이 4일과 9일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음양오행 사상으로 인간과 우주를 총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도표가 바로 ‘태극도’(太極圖)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다시 오행이 나오고 오행에서 만물이 성립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도표가 태극도다. 태극도는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의 우주관을 압축시킨 그림으로써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모두 태극도에 관심을 가지고 저술을 남긴 바 있다.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남영의 태극도여통서표(太極圖與通書表), 송구봉의 태극문(太極問), 우암의 태극문(太極問), 한강의 태극문변(太極問辯), 사미헌의 태극도열문답(太極圖說問答), 화서의 태극설(太極說), 노사의 답문유편(答問類編) 등이 모두 그것이다. 주자성리학에서 도를 통했다는 의미는 바로 태극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작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태극도는 조선시대에 중시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명리학의 기본원리가 바로 태극도라는 사실이다. 태극도는 명리학의 기본 골격을 완벽하게 요약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사주팔자를 보는 명리학자의 우주관이나 성리학자의 우주관이 완전히 똑같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태극도의 음양오행 원리에 의해 역사의 변천이나 왕조의 교체,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해석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태극도에서 파생한 두 아들이 성리학(性理學)과 명리학(命理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성리학은 인간 성품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고 명리학은 사람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나 같은 부모 밑의 두 아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성리학은 체제를 유지하는 학문이 되었고, 명리학은 체제에 저항하는 반(反)체제의 술법이 되었다. 성리학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양지(陽地)의 역사(歷史)가 되었고 명리학은 달빛의 조명을 받아 음지(陰地)의 잡술(雜術)이 되었다. 임금이 주재하는 궁궐 내의 학술세미나에서는 성리학이 토론의 주제가 되었고, 금강산의 험난한 바위굴 속에서 이루어졌던 당취들의 난상토론에서는 명리학이 단골 메뉴였을 것이다.

명리학과 성리학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다 보니 진단과 서자평의 인간관계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진단은 태극도를 중국 화산(華山)의 석벽에 각인하여 후세에 전한 인물이다. 태극도가 성리학자들에게 전해진 계기는 진단의 덕택이다. 그는 북송(北宋) 초기의 저명한 도사(道士)다. 후당(後唐)때 무당산(武當山)의 구실암(九室巖)에 은거하며 신선술을 연마하였으며, 북송 초기에 화산으로 옮겨와 살면서 여러 은사들과 교류하였다.

이때 화산에서 같이 수도한 인물이 바로 명리학의 완성자인 서자평이다. 태극도의 진단과 명리학의 서자평은 같은 화산에서 인간관계를 맺으며 수도한 사이였다. 사람의 인연이란 이처럼 멀고도 가깝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서로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맥락에서 서자평의 명리학이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본다면 성리학과 명리학이 같은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상호 보완적 관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사주팔자. 이는 개인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하는 점술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혁명가들의 신념체계로 작동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신비적인 것이 곧 합리적인 것이고, 종교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