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成三問이 成三問이 된 까닭

eorks 2023. 4. 25. 05:42

풍수지리(風水地理)

成三問이 成三問이 된 까닭
예를 들어 아버지 될 사람의 사주가 불(火)이 지나치게 많은 사주라고 하자. 사주에 불이 많은 기질은 엔진은 좋은데 브레이크가 약해 오버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브레이크를 보강할 필요가 있다. 그 브레이크는 물이 된다. 그러므로 화(火)가 많은 사주는 반드시 수(水)가 보강되어야 한다. ‘수’가 많은 달은 1년 중에서 음력으로 10월·11월·12월이다. 이 3달은 해·자·축(亥·子·丑)으로 상징되는데, 공통적으로 수(水)를 나타낸다.

‘화’가 많은 사람이 합궁할 때는 기왕이면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날짜도 같은 원리다. 음력이 표시되어 있는 달력을 보면 날짜마다 10간 12지가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뱀(巳)·말(午)·양(未)의 날 일(日)은 화에 해당한다. 화가 많은 사람이 합궁할 때 가능하면 날짜는 피한다. 대신 수가 많은 돼지(亥)·쥐(子)·소(丑)의 날(日)을 택한다. 음양오행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주기에서 이 날짜가 수의 기운이 많다고 보는 것이다.

날짜 다음에 시간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루 12시간(24시간) 중에서 해시(亥時)는 밤 9시에서 11시이고, 자시(子時)는 밤 11시에서 새벽 1시이고, 축시(丑時)는 새벽 1시에서 새벽 3시까지다. 화가 많은 사람의 합궁 타이밍을 잡을 때는 기왕이면 이 시간을 잡는 것이 좋다고 본다. 결혼한 공주나 왕자가 첫날밤을 치를 때는 명과학 교수가 잡아준 날짜와 그 시간에 맞추어 성교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요즘에도 결혼할 때 신랑의 사성(四星·사주팔자)을 한지에 적어 신부집에 미리 보내는 풍습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출산 타이밍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단종 때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출산에 관해 구전으로 전해지는 비화다. 성삼문의 어머니가 성삼문을 임신하자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갔다. 딸의 진통이 시작되자 이제 막 산실에 들어가려는 부인에게 친정아버지(성삼문의 외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였다. “자네 산실에 들어갈 때 다듬잇돌을 들고 가소. 아이가 나오려고 하거든 이 다듬잇돌로 산모의 자궁을 틀어 막아 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네. 다듬잇돌로 막고 있다 내가 ‘됐다’고 신호를 보낼 때 아이가 나오도록 해야 하네.”

다듬잇돌이란 옛날에 빨래를 두드릴 때 사용하던 직사각형의 넙적한 돌을 말한다. 성삼문의 외할아버지는 명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외손자가 태어나려고 하는 사주팔자를 계산해 보니 예정보다 2시간 정도 늦게 태어나야만 외손자의 사주가 좋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산모의 진통이 극심해지면서 아이의 머리가 조금씩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친정어머니(성삼문의 외할머니)가 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편에게 “지금이면 됐습니까?”하고 물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지금이면 됐습니까?”하고 또 물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다듬잇돌로 아이가 못나오게 막고 있던 성삼문의 외할머니가 세번째로 외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밖에서 ‘더 참아라’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산모는 성삼문을 낳고야 말았다. 산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삼문의 외할아버지에게 ‘3번 물었다’(三問)고 해서 이름을 성삼문(成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만약 산모가 더 참고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삼문은 39세에 죽었는데 1시간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환갑까지는 살았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삼문의 외할아버지가 그나마 다듬잇돌로 막는 처방을 한 덕택에 39세까지 살았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10대에 요절하고 말 운명이었다고 역술가들은 말한다. 어느 시간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명리학에서 팔자(八字) 가운데 두자(二字)가 바뀐다. 특히 태어나는 시(時)의 간지(干支)는 그 사람의 말년 운세와 관련된다고 해석하므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인위적으로 출생시간을 조절하는 제왕절개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궁궐 안에서 근무하는 명과학 교수의 업무 가운데 중요한 일 하나가 왕자들의 사주팔자를 보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임금은 많은 자식을 낳았다. 그러므로 많은 자식 중에서 과연 어느 왕자(大君)가 왕권을 이어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뭇사람들의 지극한 관심사였다. 물론 장남에게 우선순위가 있지만 조선왕조의 왕권 승계 과정을 보면 장남이 승계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명과학 교수는 임금의 핏줄들, 그러니까 대군들의 출생연월일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대권의 향방에 관한 1급 정보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갑이라는 왕자가 군왕이 될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소문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명과학 교수의 의견이 여론의 향배에 중요한 비중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왕자들의 운명을 알고 있다고 여겨진 명과학 교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권력투쟁에 말려들 소지가 많았다고나 할까. 예를 들어 어떤 대군은 사람들의 인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하기 위해 명과학 교수에게 압력을 넣어 가짜 사주팔자를 유포시켰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되면 반대파에서는 그 명과학 교수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궁궐 내에서 근무하는 의원(醫員)과 함께 명과학 교수는 왕권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전에 개입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의문사한 경우가 11건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만큼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치열했다는 증거다. 이 권력투쟁의 와중에 궁궐의 의원은 반대파의 음식에 독약을 타고 명과학 교수는 자신이 지지하는 대군의 사주를 조작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었으므로 그에 관한 기록들이 별로 남아 있을 리 없다. 역술계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궁궐 내에서 근무하던 어의(御醫)는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가 개업할 수 있었지만, 명과학 교수는 정년퇴직 하더라도 궁궐 밖에 나가 개업하거나 사람을 만나 사주 상담을 해주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고 한다. 명과학 교수는 왕실의 대외비(對外秘)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년퇴직하고 난 후에도 행동에 제한이 있었던 셈이다.

때문에 아무나 만날 수 없었다. 만약 전·현직 대감들이 궁궐 밖에서 명과학 교수들과 허가 없이 어울리거나 접촉하다 그 소문이 임금에게 들어가면 역모(逆謀)를 꾸미는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명과학 교수는 단순하게 사주팔자만 보아주는 직업이 아니라 때로는 대권(大權)의 향배에도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정치가와 점술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에 있다는 잠언이 이런 대목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