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부적은 캄캄한 밤길 후레쉬와 같은 것(2)

eorks 2023. 4. 22. 13:19

풍수지리(風水地理)

부적은 캄캄한 밤길 후레쉬와 같은 것(2)
四柱八字는 길흉화복 점치는 占術인 동시에 세상을 뒤엎으려는 혁명가들의 신념체계였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조선왕조 때 일어난 대부분 반란사건의 반란 가담자 취조 과정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四柱八字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주팔자는 어떤 형식으로 반란사건과 연결되었던 것일까. 사주팔자가 개인의 吉凶禍福을 예측하는 점술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혁명가들의 신념체계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역사의 정권교체 과정에 음지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온 담론체계인 사주팔자와 명리학의 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번성한 점집들. 특히 인터넷 점집의 성황은 한국인만의 독특한 문화현상으로, 사주팔자 문화가 구세대에서 신세대로 인식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연월일시 기유정(年月日時 旣有定)인데 부생(浮生)이 공자망(空自忙)이라!’ ‘연월일시(年月日時,四柱八字를 의미)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부평초(浮萍草) 같은 삶을 사는 인생들이 그것을 모르고 공연히 스스로 바쁘기만 하다’는 옛 선인들의 말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예정조화(豫定造化)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쓸 데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결국 이미 정해진 운명에서 도망갈 수 없음을 설파한 잠언이기도 하다.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드라마틱한 방향전환이나 대단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할 때 이를 사주팔자 탓으로 돌리는 관습이 있다.‘사주팔자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 여자 팔자가 세어서 그렇다’ 등의 말은 한국사람들의 인생관에 깊이 뿌리박힌 표현이기도 하다.

매사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 숙명론에 함몰된 의지가 박약한 인간들의 넋두리이고,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이라고 하는 납득하기 힘든 연속극을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감상법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세네카가 그랬던가! 인생이란 순응하면 등에 업혀 가고 반항하면 질질 끌려간다고….

그 사람의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간지(干支)로 환산해 운명을 예측하는 방법인 사주팔자. 한국에서는 ‘운명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이를 통상 명리학(命理學)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운명을 추리한다’고 해서 추명학(推命學), 중국(대만)에서는 ‘운명을 계산해 본다’는 의미의 산명학(算命學)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뜻은 같다. 한자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한·중·일 3국은 사주팔자라고 하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진 나이 지긋한 식자층들끼리 서로 만나면 상대방의 사주팔자를 주고받는 풍습이 일부에서는 아직 남아 있다. 비록 말은 서로 통하지 않더라도 사주팔자를 보는 방법만큼은 동양 3국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3국의 대가들을 살펴보자.

일본에서는 아베 다이장(阿部泰山)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추명학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일본은 그동안 중국·한국의 명리학 수준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어 왔으나, 아베가 기존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이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면서 중국·한국의 수준을 따라잡게 되었다.

아베는 메이지(明治)대학 출신으로 중·일 전쟁때 종군기자로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면서 사주팔자에 관한 중국의 모든 문헌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일본으로 되돌아올 때 가지고 나온 문헌의 양은 자그마치 트럭 1대분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고 전해진다. 전후 그는 일본에서 이 문헌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연구해 종래의 학설을 넘어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추명학이라는 용어 자체도 아베가 창출해낸 말이다.아베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간행한 ‘아베 다이장 전집’ 26권은 현재 일본 추명학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중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작고한 웨이쳰리(韋千里)가 유명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정권이 들어선 이후 홍콩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주로 홍콩에서 활동했고 대만을 자주 왕래했다. 사주팔자를 신봉했던 장제스(蔣介石)와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웨이쳰리는 대만정부의 중요한 정책결정에 관여하는 국사(國師) 대접을 받았다.

그는 홍콩에서 활동하면서 벽안의 서양인들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으며, 특히 동양사상에 호기심이 많은 불란서 신부들에게 사주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웨이쳰리에게 사주를 배운 불란서 신부들 몇몇은 현대 서양 점성술의 개량화 작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웨이쳰리의 명성은 1960~70년대 한국에까지 알려져 삼성의 고(故) 이병철 회장도 1년에 한번씩은 꼭 홍콩에 가서 웨이쳰리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병철 회장은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는 사판(事判)과, 신비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는 이판(理判)을 모두 종합하는 이사무애(理事無碍·理와 事에 걸림이 없음)의 경지를 추구하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첨단산업의 전문가는 물론이고 역술에 정통한 술객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을 대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취향이 있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서도 역시 1970년대 이후 이석영(李錫暎,1920~83)·박재완(朴在琓, 1903~92)·박제현(朴齋顯, 1935~2000)과 같은 대가들이 출현해 정·재계 인사들의 정책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별도의 장에서 이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루겠지만, 이 세 사람이 한국의 정·재계 중요 인사들의 진로와 인사문제들을 상담해 주면서 발생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소설이 따로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이들은 음지에서의 영향력은 상당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양지에서는 별로 대접받지 못했다. 중국의 웨이쳰리나 일본의 아베가 누렸던 사회적 지위와는 거리가 먼 대접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명리학이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전통적 세계관으로써 어느 정도 대접받았던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점쟁이’ 또는 ‘미신·잡술’로 평가절하되면서 공식적인 담론체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그 결과 학계에서도 이 분야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같은 ‘미신·잡술’이면서도 무속신앙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한 편인데, 사주팔자에 대한 연구는 이상하게도 별로 시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다 보니 사주팔자는 한국사회의 이면문화(裏面文化, behind culture)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는 논의되지도 주목 받지도 못하지만, 무대 뒤로 한걸음 들어간 배후에서는 활발하게 유통되는 문화가 ‘비하인드 컬처’라고 할 수 있다. 사주는 그러한 비하인드 컬처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문화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