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명리학과 한의학 꿰뚫은 大家 한동석의 大예언(9)

eorks 2023. 8. 2. 02:34

풍수지리(風水地理)

명리학과 한의학 꿰뚫은 大家 한동석의 大예언(9)
한동석과 이제마
이제마는 비방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였던 한동석 외할머니의 오빠가 “그 비방은 언제나 보여주실 겁니까”하고 물으면 “내가 죽을 무렵에 주겠다”고 답변하고는 하였다. 그 비방을 얻기 위해 외할머니의 오빠는 이제마 선생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잡아놓고 살았다. 임종이 가까이 오면 곧바로 이제마 선생에게 달려가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이제마 임종후 도착해 비방을 입수할 수는 있었으나 거기에 씌여진 한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한자들은 이제마가 새로 창안한 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이야기가 묘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마는 생전에 자신의 묘자리를 미리 보아놓고, 자신이 죽으면 관을 깊이 파묻으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9자(270㎝) 가량 깊이 파서 관을 묻으라는 당부였다. 왜 그렇게 깊이 묻어야 하느냐고 물으니 이제마는 “말 발굽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다”는 대답을 하였다. 과연 해방 이후 소련군이 진주할 때 바로 그 묘의 옆길로 소련군 탱크들이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이를 목격한 후인들은 “이제마가 과연 명인은 명인”이라는 이야기들을 하고는 하였다. 해방 이후 함흥 일대에서 이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한동석은 이처럼 유년시절부터 이제마에 대한 전설을 들으면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제마와 얽힌 또 하나의 인연은 전처의 죽음이다. 한동석은 20대 후반에 함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재혼을 하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인이 폐병을 앓아 1942년에 사망하였다. 부인이 죽기 전 폐병 치료를 위해 이제마의 이전제자(二傳弟子) 중 하나라고 하는 김홍제라 한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김홍제가 부인의 폐병을 치료해 주면서 “다음에 다시 재발하면 그때는 손을 쓰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다. 결국 처음에는 치료가 되었으나 나중에 부인의 폐병이 다시 재발하면서 사망하고 말았다.

한동석은 이 일을 겪으면서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홍제 밑에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후일 한동석이 이제마의 저술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의 주석서를 남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마와 한동석의 한의학적 연결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모두 이북 사람이라는 점이다.

앞장에서 ‘사주첩경’을 쓴 이석영 선생을 이야기할 때도 언급한 부분이지만, 이북 사람들은 이남 사람들에 비해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풍수·사주·한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 이 방면의 대가들의 출신지를 보면 이북 출신이 아주 많다. 그 이면에는 이북 사람들이 받았던 지역 차별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조선 시대에 이북 사람들은 정부 고위직에 올라가기가 어려웠고 정치적으로 차별당했다. 이북 출신인 백범(白凡) 김 구(金 九) 선생이 ‘삼남’(三南)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에도 이러한 정황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西村)에서 태어난 것을 늘 한탄했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三南)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西北)이로다. 내가 해서(海西) 상놈이 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의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라는 소회가 바로 그것이다.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