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과 한의학 꿰뚫은 大家 한동석의 大예언(8)
과연 40년전 한동석의 예언대로 목기와 화기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여 2002년 이후의 한국 정권을 운영하고, 이 시기에 진짜 통일이 될 것인가. 이는 지나 보아야 알 일이다. 예언이 100% 맞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예언을 밑그림에 깔고 앞으로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는 일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한박사에 의하면 한동석은 6·25를 보는 안목도 특이하였다. 음양오행적인 시각에서 6·25의 발발을 해석하였다.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는 강은 한탄강인데, 한탄강 이북이 북한이고 이남이 남한이다.
오행으로 보면 이북지역은 북방수(北方水)에 해당하고, 이남지역은 남방화(南方火)에 해당한다. 이북은 물이고 이남은 불이다. 그런데 소련의 상징이 백곰이다. 백곰은 차가운 얼음물에서 사는 동물이니 소련 역시 물이다. 중국은 상징동물이 용이다.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이어서 중국 역시 물로 본다. 이북도 물인데, 여기에 소련의 물과 중국의 물이 합해지니 홍수가 나서 남쪽으로 넘쳐 내려온 현상이 바로 6·25다.
대전은 들판이라서 그 홍수가 그냥 통과하고, 전주·광주도 역시 마찬가지로 통과하였다. 그러나 대구는 큰 언덕이어서 물이 내려가다 막혔다. 울산·마산은 모두 산이어서 물이 넘어가지 못했다. 부산은 불가마이니 물을 불로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가 6·25의 피해를 덜 본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밖의 예언을 간추려 보면 2010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임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될 수 있으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딴따라’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 또한 그대로 되고 있다. 한동석은 1963년 1월부터 자신이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생일, 생시인 6월8일(음력) 인시(寅時)에 닥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 생일, 생시를 넘긴다면 자신이 더 살 수 있을 것이나 아무래도 그것을 넘기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본인의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룡산으로 내려가 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예견대로 6월8일 축시에 사망하였다. 2시간 정도만 견디면 인시를 넘길 수 있었으나 자신의 생시를 코앞에 두고 그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임종한 것이다.
가족문제도 그렇다. 생전에 본인이 죽고 난 뒤 온 식구가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앉을 것이라며 대성통곡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본인의 임종후 가세가 기울어 인사동 집을 비롯한 가산을 팔고 가족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국토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보았다. 한반도 남쪽이 물에 잠기는 반면 서쪽 땅이 2배쯤 늘어난다고 예언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쪽지방이 물이 잠긴다는 말은 댐이 들어선다는 말이었고, 서쪽 땅이 2배 늘어난다는 이야기는 서해안에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는 것이 한박사의 술회다.
한동석은 이처럼 탁월한 한의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앞일을 내다보는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적 뿌리는 어떻게 되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한동석의 한의학에 대한 뿌리를 소급해 올라가면 놀랍게도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1837~ ?)를 만난다.
한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동석의 외할머니가 원씨(元氏)였는데, 그 외할머니에게 오빠가 있었다. 이 오빠가 이제마 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제마의 고향도 함경남도이고 한동석의 집안도 같은 함경남도였던 만큼 서로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연유로 한동석의 집안에서는 이제마에 관한 일화들이 구전되어 왔다.
그 구전을 보면 이제마는 시간이 나면 아무 풀이나 입으로 씹어 맛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약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우물우물 풀을 씹고 있다 보니 미각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독초를 씹었을 때는 며칠 동안 음식을 못 먹고 고생하다 회복되면 다시 새로운 풀을 씹어보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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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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