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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대감 일화

eorks 2024. 5. 5. 15:00
                                                                          약포대감 일화

정탁(鄭琢.1526.중종 21∼1605.선조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시호는 정간(貞簡). 

이야기1. 내성천 고평들을 개간하여 무상으로 분배하다.

약포가
낙향 때 나라에서 많은 은전(恩典,공신녹)을 내리려 했지만 국난을 겪은 어려
운 시기라며 이를 사양했다.
그래도 나라에서 굳이 은전을 베풀려고 하자 낙동강지류인 내성천의 관리권을 받아와
지금의 고평큰들을 개간해 이 일대 사람들의 농토 기반을 마련하라고 무상으로 분지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평동계경정약문(高坪洞契更定約文)을 만들어 지역 사회풍속을 순화시켰
다.

이야기2. 두사충을 구하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벽제전투에서 왜적에게 패한 책임을 물어 그의 참모인 두사충
을 참수하려 하자, 약포는 "전시에 인재를 참수하면 불리하다"며 구명했다. 두사충
은 은혜를 갚고자 문경 가은현 아호마을(아포마을)에 노후 양택지를 찾아 잡아 주었
다고 한다. 퇴직하고서 이곳에서 일시 우거하면서 집을 지으려 하자, 집터 주변의 주
민들이 약포대감의 집을 짓는데 노력 동원 될 것을 염려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집 
짓는 것을 포기하였고, 두사충이 점지해 주었다는 묘터는 찾지 못하였다. 또 두사충
은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지방의 명당터 10곳을 적어 
주었다. 그 뒤 많은 풍수들이 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야기3. 초립동을 업어 건네다

약포는 만년에 우국의 수심을 안고 내선천에서 배를 저어 고기잡이로 소일을 하며 고
향의 민중들을 보살폈다.
낚시하던 어느 날 한 초립동이 큰소리로 배를 불러 노인의 등에 업혀 배에 올라 탄 후
강을 건너 면서 "요즘 이곳에 사는 약포대감이 어떻게 소일하고 지내는가"하고 물었
다.
노인은 "예, 이렇게 낚시 하다 길손을 업어 건네주기도 하면서 지냅니다"라고 하자
초립동은 깜짝 놀라면서 대감을 몰라본 죄를 사죄했다.

이야기4. 불을 켜지 않은 밤에도 편지를 쓰는 시력(視力)

대감이 약관 시절 겸암 유운룡(謙菴 柳雲龍)은 일찍부터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아우인 서애 대감(西崖 柳成龍)은 약포보다는
16년이나 손아래이면서도 약포 선생의 인물됨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낌새를 알고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저녁 때 아우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전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 에게 주면서 이 편지
를 고평(예천읍)에 있는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 밤까지 돌아 오
라 하였다. "형님 그렇게 작은 글씨로 된 편지를 촛불을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 텐데 그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하며 서애가 말하였다.
겸암은, "약포는 밤중에라도 그 편지를 읽어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하며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과연 새벽녁에 예천 고평에 갔던 하인이 약포의 답장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 에게 겸암은,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고 있더냐?"하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서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애는 약포가 초인(超人)한 인재인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더하여 임진왜란(壬
辰倭亂)을 협력하여 슬기롭게 극복 해 나갔다고 한다.

이야기5. 도량(度量)이 넓은 시(詩)에 콧대 꺾인 

약포가 젊었던 시절 맏동서 되는 사람이 아우 동서인 약포의 체격이 왜소하다는 것을
얕잡아 보았다. 이를 눈치 챈 장인 습독 반충(習讀 潘沖)은 본래 지인지감(知人之感)
이 있어 둘째 사위 약포가 큰 그릇임을 알고 있었다.
이를 사위에게 인물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가 하루는 갑자기 두
사위를 불러 앉히고 등잔불을 보고 일곱 자의 시(詩)를 지으라고 하였다. 맏사위가 먼
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흰 용이 구슬을 물고 강을 건너온다. 白龍含珠渡江來
*희 용은 솜으로 된 심지, 구슬은 불꽃, 강은 접시를 상징한다."
묵묵히 맏동서의 시를 들어다보고 앉았던 약포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모든 나라의 성안엔 한 나라의 깃발이 꽂혔다. 萬國城中揷漢幟
*만국의 성안에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

아우 동서가 지은 시를 들어다 보고 있던 맏동서는 깜짝 놀랐다. 기름이 담긴 조그만
접시를 자신은 하나의 강(江)으로 밖에 못 보는데, 아우 동서인 약포는 접시를 천하
(天下)로 보는 데는 그 도량과 포부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그만 질려버려서 그런 다음
부터 약포를 마음속으로 존경(尊敬)하며 따랐다고 한다.

이야기6. 큰 인물임을 알아맞춘 명(明)나라의 관상사(觀相師)

약포가 체약하고 키도 매우 작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명나라에는
처음 길이라 이 사실은 알려진 바가 없다. 어느 해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갔은 때
의 일이다.
약포는 천자(天子)를 만나러 궁중(宮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초라
하게 보일까 염려되어 신을 한 치 정도 높여서 본래의 키보다 크게 하여 천자를 배알했
다. 천자 옆에 있던 한 대신이 약포를 보고 "진인군자(眞人君子)로 만민을 구제할 상"
이라고 하였다. 
작은 체구였지만 총명과 박ㅎㄱ으로 기만한 판단을 내릴 때는 중국 대신들도 경탄했다
고 한다.
그때 명나라 왕실에 관상(觀相)을 잘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약포를 보고는 "조선
사신으로 온 저 사람의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재상(宰相)이 될 상인데 아깝구나."하
였다. 이 말을 귓전으로 엿들은 약포는 그다음 날 궁중에 들어갈 때는 높였던 뒷굽을 다
시 낮추어 본래의 키대로 들어갔더니, 어제 그 사람이 무릎을 탁치면서, "그러면 그렇
지!"하면서 "과연 조선에서 온 정탁(鄭琢)은 큰 인재임이 틀림없구나"하였다.

이야기7. 꿈에서 얻은 용(龍)의 알

약포가 태어난 곳은 용문면 하금곡리이다. 예천읍내의 고평리에 새로 집을 짓고 우물
을 팠으나 웬일인지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애를 쓰다가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이 꿩알 만한 돌을 주면서 "이 알을 파던 우
물 속에 넣으면 물이 날 것입니다."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며칠이 지나간 어느 날, 금당실에 볼일이 생겨서 옛 집터에 들렸더니 뜻밖에도 얼마전
꿈에 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다. 약포는 그 돌을 소매에 집어넣고 고
평으로 돌아오서 꿈에 용이 시키던 대로 파던 우물에 집어넣으니 이게 웬일이냐! 그 돌
이 우물 밑에 떨어지자 말자 한 방울의 물도 비치지 않던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현재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하고 있으
며, 지금도 그 돌은 남아 있어 해마다 한 차례씩 우물을 가시어 내고 우물 속에 들어 있
는 이 돌을 닦아서 고이 우물에 모셔 넣는다고 한다.

이야기8. 약포대감의 체온(體溫)

약포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돌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서애가 볼 일이 생겨 약포와 하룻밤 자게 되었다. 한겨울철 불기라곤 전혀 없는
냉방(冷房)에 더구나 이불도 없이 누웠으니 춥기보다는 이가 덜덜 떨려서 한참도 배
기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약포는 서애에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얼마 후 서애가 누운
자리가 되 식을 무렵이 되면 약포는 또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번번히 약포가 누웠던
자리는 따뜻하였다. 이렇게 자리를 세 번씩이나 바꾸어 가며 길고 긴 겨울밤을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따뜻하게 새웠다고 한다.

이야기9. 메기가죽 북

약포 종가에 메기 가죽으로 만든 북이 있었다. 이 북은 크기가 지름 35cm, 둘레
119cm, 테의 너비 18cm이고 무게가 2.3kg으로 가볍다. 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연
이 전해온다.
400여 년 전 도정서원(道正書院) 벼랑 아래 소(沼)가 있었다. 이 소 위에 송아지를 자
주 매어 놓고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송아지가 없어져 주위를 살펴보니 송아지의 꼴삐가 이 소(沼)에 내려
가 있었다. 
소에는 전부터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전해와 이 이무기가 잡아먹은 것으로 생각 하
고 죽은 송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며칠 후 큰 낚시를 만들어 소에 담구어 두었더니 
큰 물고기가 물렸다. 
동네 사람들이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고기를 건져 올려놓고 보니 어마어마한 큰 메기
가였다.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메기였으니 크기가 짐작이 갈 만하다. 
이 메기를 잡아 놓고 보니 신비감도 느끼고 겁이 나기도 하였으나 이왕에 잡은 고기를
살릴 수 없어 가죽을 벗겨 영원히 기념하고자 북을 만들게 되었다.
이 북이 지금까지 보관돼 오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100년 전쯤 도정(道正)에
살 때 가죽이 32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식사시간에는 메기북을 쳐서 알렸다고 한다.

이야기10. 13세에 기삼백 수를 풀다.

약포는 일찍이 8세 때 글을 깨우쳐 능통할 정도로 영민하였다. 13세 때 금사사(金沙
寺)에서 함께 공부하고 훗날 대사헌을 지낸 백담(栢潭) 구봉령은 "약포는 당시 학질
을 앓고 있으면서도 태음력의 계산법인 기삼백(朞三百)을 혼자 풀어내어 음력의 윤
달과 윤년의 법칙을 통달했다."고 극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