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온 글

매가 죄인을 만든다 (황희정승 일화)

eorks 2024. 4. 23. 00:41
                    매가 죄인을 만든다 (황희정승 일화)
방촌선생 영당
 
방촌 황희 선생 영정


황희정승: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 했으나, 이성계
                 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
                 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
                 품도 전해진다.


일화: 황희 정승이 모처럼 좋은 날씨에 낮잠을 자려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
         을 떴다.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니 쥐 두마리가 선반 위의 접시에서 배를 운반 하고
         있었다.
         황희 정승은 미물인 쥐가 협동하는 것이 신기하여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시 잠을 자던 황희 정승은 밖에서 들려오는 여종의 울음소리에 잠이 깨
         었다.
         밖을 살펴보니 여종이 정경부인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하인 왈: 아닙니다. 마님! 흑흑! 제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부인 왈: 그럼 선반에 있던 배가 어디로 갔단 말이냐! 바른 말을 할 때 까지
              매를 칠 테니 어서 말해라.

놀란 황희 정승이 진실을 말해주려 다가가는데,  
그 때 여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인 왈: 마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흑...... 흑.....

 이것을 본 황희 정승은 고문과 매 때문에  없는 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세종대왕을 배알하여 자초지종을 아뢰자 즉시 죄수들 중 증거가 확실
하지 않은 사람을 풀어 주었다.


세종의 청렴한 정승, 맹사성의 일화와 황희정승과의 비교

조선 초 세종의 놀라운 업적에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모범을 보이는 삼정
승이 있었습니다. 
황희, 맹사성, 윤회는 세종의 측근으로 재상을 맡아 조선의 발전을 이룩하였습니
다. 
그 중에서 맹사성은 예의가 바르고 소박하면서도 업무에는 강직하여 공직자의 
모범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청렴한 세종의 정승, 맹사성의 생애와 업적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맹사성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는 최영 장군을 본받아 살고자 했다
고 합니다. 
재능이 있고 성품이 올바르기 때문에 최영의 숙적인 이성계도 맹사성을 조선 건
국후에도 중용하였습니다.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와 좌의정에 오르기까지 맹사성은 세종의 여진정벌을 
돕고 조선 초의 음악을 정비하였으며, 과거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농사개량에 
힘썼습니다. 
특히 여진정벌은 다른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맹사성이 세종의 뜻을 받아 영
토를 확장할 수 있도록 공헌한 것입니다. 

(부드러운 리더쉽, 청렴하고 효성스러운 인강성의 맹사성)

맹사성은 세종의 태평성대를 보필하면서 여러 차례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려고 
했었으나, 한 번도 윤허하지 않을 정도로 세종은 맹사성을 믿었었습니다. 
나이가 많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세종은 맹사성
의 자문을 구하곤 했었습니다. 
태종실록과 팔도지리지 편찬에 공헌하였고 특히 조선 전기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맹사성은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았기 때문에 향악 정리와 악기 개발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세종의 충신인 김종서를 천거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질고 부드러운 학자 맹사성과 강직하고 명확한 학자 황희 

세종의 재상으로 유명한 황희정승과 맹사성은, 세종의 믿음을 받으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황희정승도 맹사성처럼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으로 황희와 맹사성을 반드시 뽑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희정승은 강직하고 명확한 성격이었고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래서 세종이 외교, 국방, 행정 등에는 황희가 나서게 하였고, 
교육, 제도, 문화 등에는 맹사성이 나서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맹사성과 함께 세종의 재상이었던 황희정승)

세종 말년, 유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근간을 어기고 세종이 대궐에 내불당을 
지으려고 하자 황희와 맹사성은 또 다른 모습도 보였습니다. 
처음엔 반대했던 황희는 세종의 마음에 동화되어 대신들을 회유하기도 했지만, 
맹사성은 오히려 유학자로서 강직하게 반대하며 집현전 학자들에게 반대의 뜻
을 넓히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다른 기록을 보면 황희가 뇌물을 받고 간통을 했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황희와 맹사성에 대한 세종의 신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맹사성의 부드럽고 소탈한 인간성 

맹사성은 특히나 효성이 지극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도 수록되었습니다. 
맹사성은 벼슬 중에도 부모의 봉양을 위해 여러 번 스스로 벼슬을 그만 두려고 
했었습니다. 
또한 맹사성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며 예를 차릴 줄 알았으나, 업무에 
있어서는 엄격하여 사리분별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맹사성은 벼슬이 낮은 사람이 오더라도 예의를 갖추어 배웅까지 했었으며, 
하인의 잘 못에도 항상 너그럽게 대응했다고 합니다. 

맹사성의 고택

공직자 청렴의 귀감으로 여길만한 맹사성의 검소함도 유명합니다. 
공무를 볼 경우가 아니라면 맹사성은 걸어 다니거나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고위관료는 역마나 가마를 이용했는데, 맹사성의 이런 검소함 때문
에 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 모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맹사성의 일화 중에는 고향인 온양의 지명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세종이 질병으로 고생할 때 온천치료에 수행하곤 했는데, 이때 세종은 "온양"이
라는 지명을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온양 온천"의 지명입니다. 
지금은 행정구역 정비로 충남 아산시가 되었습니다. 

아랫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윗사람에게는 충직하며, 재물에는 소탈하고 가족에
게는 따스한 인물이 바로 맹사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