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은 어느 날 마당가를 서성이며 바람을 쏘이다가 때마침 빨랫줄에 제비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무덥던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그의 가 슴 속에는 깊이 도사리고 있던 放浪癖(발랑벽)이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어오는 동녘바람에 제비가 날아들어 복숭아나무 아래로 옛집을 찾아오네. 봄이 가면 너도 또한 멀리 날아가서 봉숭아 꽃 피는 내년 봄을 기다리리. 一任東風燕子斜(일임동풍연자사) 桃李樹下訪君家(도리수하방군가) 君家春盡飛將去(군가춘진비장거) 留待桃李後歲花(류대도리후세화)
익균이는 아버지의 심정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그저 해설만 들으면서 뛸 듯이 좋아하는데,
마누라가 소쿠리에 참외를 따 가지고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네 아버지가 얼마나 잘난 양반인지는 모르겠다마는 너 만은 제발 아버지 를 닮지 마라.」하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아버지라도 남편으로서는 원망스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마누라가 번번이 원성을 늘어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훌쩍 집을 나가서 10년이 넘도록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 으니 어떤 마누라가 그 남편을 원망하지 않을 것인가.
김삿갓은 죄인이라도 된 듯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참외 하나를 집어 아내에게 권한다.
오래 만에 원망스럽던 남편에게서 따뜻한 정을 느낀 아내는 눈시울을 붉 히며 참외를 받아 깎는데,
익균이는 깎지도 않은 참외를 정신없이 먹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참외에 대한 시를 지어 달라고 보챈다. 겉모양은 위장군과 흡사하고 속마음은 연나라 태자를 닮았구나. 너는 본시 땅 기운을 받아 태어났는데 어째서 하늘처럼 둥글게 생겼느냐. 外貌將軍衛(외모장군위) 中心太子燕(중심태자연) 汝本地氣物(여본지기물) 何事體天團(하사체천단)
고사를 인용하여 지은 어렵고도 익살스러운 시였기 때문에 익균은 고개 를 갸웃거리며 꼬치꼬치 캐묻고, 김삿갓은 알아듣기 쉽도록 자세히 설명 을 한다.
「그 옛날 漢(한)나라에 衛靑(위청)이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느니라.
그러기에 나는 참외빛깔이 푸른 것을 푸르다고 직선적으로 말하지 않고, 衛將軍(위장군)과 같다고 푸른 빛깔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그리고 중국춘추시대에 燕(연)나라 太子(태자) 중에 丹(단)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가 있 었단다.
그래서 참외 속이 붉은 것을 연나라 태자 같다고 간접 표현한 것인데, 이런 것들은 시를 짓는데 있어서 하나의 멋이란다.」
익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다음은 다 알겠다는 듯이
「참외는 땅의 기운을 받아 자랐기 때문에 모양새가 땅처럼 평평하게 생 겼어야 옳을 것인데, 어째서 하늘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겼느냐는 표현은 퍽 재미있네요.」하고 웃는다.
김삿갓은 어린 아들의 시 감상력에 거듭 놀라고 감격스러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슴 속은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마누라는 아들이라도 장차 대과에 나가 장원급제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지 만, 할아버지의 대죄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