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가을이건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번민의 계절이요, 애상의 계절인 것이다.
「조상에 대한 속죄로 한평생을 방랑객으로 살아가려던 내가 양심을 속여 가 며 가족들과 함께 이렇게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어도 좋단 말인가.」
김삿갓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며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 한번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벼슬을 좋아하는 사람은 조정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 山林之士往而不能反(산림지사왕이불능반) 朝廷之士入而不能出(조정지사입이불능출)
나는 산을 좋아할 줄도 모르는 무뢰한에 불과 하더란 말인가? 이렇게 자탄 하고 있을 무렵 五臺山 上院庵(오대산 상원암)에서 찾아 왔다는 한 스님이 그를 따돌리려는 마누라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이를 눈치 챈 김삿갓이 쪽지를 감추려는 마누라를 구슬려서 건네받아 펼쳐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지 않은가.
물을 평지에 부으면 제각기 동서남북으로 흘러가듯이 인생도 운명이 있는데 어이 가면서도 탄식이요 앉아서도 수심인가. 瀉水置平地 各自東西南北流(사수치평지 각자동서남북류) 人生亦有命 安能行歎後坐愁(인생역유명 안능행탄후좌수)
술을 마시며 스스로 용서하고 잔을 들어 떠나기 어려움을 노래하네. 마음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느낌이 없을쏘냐? 소리를 삼키고 주저하며 감히 말을 못할 뿐이로다. 酌酒以自寬 擧杯斷絶歌路難(작주이자관 거배단절가로난) 心非木石豈無感(심비목석기무감) 呑聲躊躇不敢言(탄성주저불감언)
상원암에서 왔다는 노승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는 김삿갓의 행동과 속마 음까지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
「그대는 한평생 방랑의 길을 걸어갈 운명을 타고 났는데 무엇 때문에 방안 에 들어앉아 홀로 고민하고 있느냐.」고 꾸짖고, 술을 마셔가며 스스로를 위 로해 보려는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삿갓은 결연히 떠날 결심을 하고, 아내에게는
「홍성에 가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 뵌 후에 서울로 올라가 형님과 그에게 양 자 간 큰 아들鶴均(학균)이를 만나보고 오겠노라.」고 적당히 둘러대고 다시 돌아올 기약 없는 방랑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