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金顯承)님의 詩
1.<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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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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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견고(堅固)한 고독>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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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눈물>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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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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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대 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詩)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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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파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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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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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나무>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녁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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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 (金顯承,1913~1975). 호는 다형(茶兄). 광주(光州)출생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전남 숭실중 교사, 조선
대, 숭실대 교수를 지냄 1934년 <동아일보>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으로 등단. 아버지가 목
사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그는 건강한 시
상으로 고독과 신앙을 주제로 한 시를 썼으며, 시집<견
고한 고독> 이후 부터 고독 의식을 거의 절대주의적 경
지에까지 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역정보다 그
의 시의 형이상성, 사상과 감정 그리고 이미지의 통합
된 감수성, 중층 묘사등의 방법은 주정주의(主情主義)
일변도인 한국시의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발전으로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작에 <눈물>,<창>
<플라타너스>,<가을의 기도>, <절대고독>등이 있다.
시집에 <김현승 시초(金顯承詩抄),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견고한 고독>,<절대고독> 등과 시 해설집 <한
국 현대시 해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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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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