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최영미님의 詩

eorks 2007. 4. 14. 00:01

최영미님의

    1.<가을바람> 가을바람은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밤별들을 못 견디게 빛나게 하고 가난한 연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헤매는 거리의 비명과 한숨을 몰고 와 어느 썰렁한 자취방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그리고 생각나게 한다 지난 여름을, 덧없이 보낸 밤들을 못 한 말들과 망설였던 이유들을 성은 없고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낡은 앨범 먼지를 헤치고 까마득한 사연들이 튀어나온다 가을바람 소리는 속절없는 세월에 감금된 이의 벗이 되었다 연인이 되었다 안주가 되었다 가을바람은 재난이다 -------------------------------------------- 2.<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 3.<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4.<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은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 끝의 허망한 한모음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5.<속초에서>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살이 있었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 드문드문 건져올린 기억으로 가까운 모래밭을 두어번 공격하다보면 어느새 날 저물어, 소문대로 갈매기는 철없이 어깨춤을 추었다. 지루한 飛行 끝에 젖은 자리가 마를 만하면 다시 일어나 하얀 거품 쏟으며 그는 떠났다. 기다릴 듯 그 밑에 몸져주운 이마여ㅡ 자고 나면 한 부대씩 구름 몰려오고 귀밑털에 걸린 마지막 파도소리는 꼭 폭탄 터지는 듯 크게 울렸다. 바다, 밀며서 밀리는 게 파도하고 배운 서른두살이 있었다 더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데 비가 내리고, 어디 누우나 비 오는 밤이면 커튼처럼 끌리는 비린내, 비릿한 한움큼조차 쫒아내지 못한 세월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밤이 깊어가고 처벅처벅 해안선 따라 낯익은 이름들이 빠진다. 빨랫줄에 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치욕, 아무리 곱씹어도 이제는 고스란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세월인데, 산 오징어의 단추 같은 눈으로 횟집 수족관을 보면 아, 어느새 환하게 불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죽음이여ㅡ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 -------------------------------------------- 6.<마지막 섹스의 추억>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안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 7.<먼저, 그것이> 고개 숙이며 온다 아스팔트를 데웠다 식히는 힘으로 장롱문이 소리없이 닫히는 힘으로 초조한 이마 위 송송한 구슬땀 몇개로 사랑은 온다 첫번째 사과의 서러운 이빨자욱으로 초생달 둘레를 둥들게 베어내며 뚱뚱한 초 하나로 밤이 완성될 때 보채는 아이의 투정처럼 식은 차 한잔의 위로처럼 피곤을 넘어 반성을 넘어 어쩌면 사랑은 온다 망설이는 마음 한복판으로 어제의 사랑을 지우며 더듬거리며 오늘, 사랑이 내게로 온다 주저하는 나보다 먼저, 그것이 내게로 온다 ------------------------------------- 8.<위험한 여름> 시라는 걸 쓰기 시작한 뒤 처음 맞는 8월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술 마신 다음날 반쯤 시체가 된 몸은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고만 싶어 창문을 열면, 매미소리와 함께 마지막 여름이 가고 놀이터 아이들은 키 큰 잠자리채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무성한 벌레울음과 그 뒤에 오는 짧은 침묵 사이로 어제의 시가 유산되고, 간밤의 묵은 취기도 마저 빠져 나가고 맴맴, 맴돌기만 하던 생각도 가고 그대와 함께 여름이 간다 아직 배반할 시간은 충분한데......그리 높지고 푸르지도 않은 하늘 아래 구름은 또 비계 낀 듯 잔뜩 엉겨붙어 뭉게뭉게 떨어지지 않고 다만, 거짓말처럼 천천히 서로 겹쳐졌다 풀어지며 경게를 만들었다 허무는 힘으로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고 다만, 한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뭉개며 제각기 비비다 울며 여름이 간다 ---------------------------------------------- 9.<목욕> 한때 너를 위해 또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씻고 닦고 문지르던 몸 이제 거울처럼 단단하게 늙어가는 구나 투명하게 두꺼워져 세탁하지 않아도 제 힘으로 빛나는 추억에 밀려 떨어져 앉은 쭈그렁 가슴아ㅡ 살 떨리게 화장하던 열망은 어디가고 까칠한 껍질만 벗겨지는 구나 헤프게 기억을 빗질하는 저녁 삶아먹어도 좋을 질긴 시간이여 ---------------------------------------- 10.<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11.<슬픈 까페의 노래>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웃침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거운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씹었었지 호호탕탕 훌훌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겼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姦飮의 목격자 ---------------------------------- 12.<인생>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 13.<나의 대학> 이제 어쩌면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떠난 뒤에 더 무성해진 초원에 대해 아니면, 끝날 줄 모르는 계단에 대해 우리 시야를 간단히 유린하던 새떼들에 대해 청유형 어미로 끝나는 동사들, 머뭇거리며 섞이던 목소리에 대해 여름이 끝날 때마다 짧아지는 머리칼, 예정된 사라짐에 대해 혼자만이 아는 배신, 한밤중 스탠드 주위에 엉기던 피냄새에 대해 그대,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나란히 접은 책상다리들에 대해 벽 없이 기대앉은 등, 세상을 혼자 떠받친 듯 무거운 어깨 위에 내리던 어둠에 대해 가능한 모든 대립항들, 시력을 해치던 최초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 그대, 내가 배반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첫번째 긴 고백에 대해 너무 쉽게 무거웠다 가벼워지던 저마다 키워온 비밀에 대해 눈 오는 날 뜨거운 커피에 적신 크래커처럼 쉽게 부서지던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느날 오후에 대해 아, 그러나, 끝끝내 , 누구의 무엇도 아니었던 스물살에 대해 그대, 내가 잊었을지고 모를 이름이여 그렁그렁, 십년 만에 울리던 전화벨에 대해 그 아침, 새싹들의 눈부신 초연함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행여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줄, 아직 한 사람쯤 있는지요 --------------------------------------- 14.<24시간 편의점> 1 언제든지 들러다오, 편리한 때 발길 닿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시동 끄고 아무데나 멈추면 돼 거기 내가 있을게 꽃가마 없어도 연지 찍고 곤지 찍고 밤새워 불 밝히며 기다리고 있을게 2 오늘은 어쩐지 불을 켠 채 잠들고 싶다 해거름 술이 올라 내 안의, 내 밖의 살아 있는 것은 내게 맞선다 아침이면 한없이 착해질 욕망도 당당히 자기를 주장하고 철 지난 달력이 넘겨달라 아우성 읽어달라 애원하는 저 거룩한 이름의 시집들 간절한 눈빛 외면한 채 단호히 더듬거리며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다시 올린다 3 언제든지 들러다오, 편리한 때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아무데나 멈추면 돼 노동의 검은 기름 찌든 때 깨끗이 샤워하고 죽은 듯이 아름답게 진열대 누운 저 물건들처럼 24시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을게, 너의 손길을 여기는 너의 왕국 그저 건드리기만 하면 돼 눈길 가는 대로 그저 한번, 건드리기만 하면 돼 4 오늘은 어쩐지 너를 기다리며 자고 싶다 철 지난 달력도 거룩한 이름의 시집도 뱃속의 덜떨어진 욕망도 한꺼번에 날 배반하는 가슴에 불을 켜고 자는 밤 ------------------------------------- 최영미 : (1961 ~ ) 서울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1962년 계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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